지난해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100% 대한민국'을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근년에 전세계 시위 현장을 휩쓸었던 구호이자 야당 선거전략에도 활용된 '1% 대 99%' 사회를 넘어 대통합을 이뤄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지만, 그 말이 못내 불편했다. 뜻 맞는 이들끼리 뭉친 동아리나 영리 목적의 조직도 아니고 오천만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라에서 그 무엇을 기준으로 삼든 '100%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에누리 없이 완결된 숫자로 표현된 저 구호에서 다름 혹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도, 포용하지도 않았던 지난 시절의 암울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좋게 보아 사회 통합을 위해 노력은 하겠다는 데 짠 점수라도 주고 싶었지만, 박근혜정부는 그 엷은 기대마저 여지없이 허물어 버렸다. 우리사회를 짓눌러 온 지역과 계층, 세대, 이념 등 온갖 갈등의 골은 이 정부 출범 이후 더욱 깊어졌다. 그것이 모두 박근혜정부 탓은 아니라 하더라도, 탕평인사니 경제민주화니 복지 확대니 스스로 거듭 강조했던 약속마저 무람없이 뒤집고는 납득할 만한 해명도, 진심을 담은 사과도 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공염불로 드러난 '100% 대한민국' 구호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려했던 대로 다름을 인정하지도 포용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 그 다름을 사회 통합을 해치는 적(敵)으로 몰아 붙여 때로는 법의 잣대로, 여의치 않을 땐 초법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뿌리 뽑으려 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온갖 파문은 그런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직적인 여론 조작에 나선 국정원의 범죄행위 자체는 전 정부 아래 벌어진 일이니 "나와 상관 없는 일"이란 강변이 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원 개혁 요구를 끝내 외면한 것이나 정부의 끈질긴 반대를 무릅쓰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식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직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혼외자 의혹을 빌미 삼아 찍어낸 것 등은, 국정원 사건이 결코 이 정부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님을 드러냈을 뿐이다.
온갖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면 그나마 비난을 덜 샀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정부, 여당 인사들은 한결같이 국정원 사건에 뿌리를 둔 작금의 혼란 상황에 가장 나쁜 방식으로 개입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이 연루된 내란음모 사건 역시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통진당에 대한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강행했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트위터 121만여건이 새로 드러나면서 대통령 사퇴 촉구까지 나오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박창신 원로신부의 강론에서 맥락은 거두절미한 채 일부 발언을 문제 삼아 사회 전반에 걸친 '종북몰이'에 여념이 없다. "국적이 의심스럽다"(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거나 "북한의 지령"(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운운하는 경악할 발언보다는 덜 하지만, 정치적 견해 표명을 서슴없이 "국론 분열"로 모는 박 대통령의 말에서도 섬뜩함이 느껴진다.
"국민을 편가르거나 선동하지 않고 100%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그런 건설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을 대입해 보면, "국민을 편가르거나 선동하지 않고"라는 말은 거짓이거나 심각하게 비뚤어진 인식을 드러낸 언사일 뿐이다.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낫겠다. 뻔히 속내를 알고도 속아주는 것이 선거판이니까. 그러나 '편가르기나 선동'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인식이 시쳇말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정말 큰 일이다. 이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겨우 10개월째. 남은 4년여의 기간에 '100% 대한민국'이란 저 구호의 위험한 작동이 도대체 어디까지 치달을지 걱정이다.
이희정 사회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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