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고 2차 대전 전범국 족쇄를 풀어주기 얼마 전이다. 워싱턴을 찾은 한 중견 언론인이 미국에 나와 있는 한국 특파원들이 한미관계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고 사석에서 말했다. 미국이 미일 관계보다 한미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고 믿는 분위기가 한국에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나중에 오해가 없다는 취지였다. 미일관계가 축적된 게 엄청나고 일본의 국력이나 외교 노하우가 한국보다 몇 수 위인 것은 워싱턴이 아니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그런 당연한 얘기를 꺼낸 것은 워싱턴 발 기사로 한미관계가 더 중한 것처럼 한국 내 분위기를 달뜨게 만들지 말라는 책망과 당부로 들렸다.
그의 말을 들은 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되짚던 차에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가 터졌다. 사실 최근 한미관계에 대한 한국의 오해를 미국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보다 더 잘 보여준 사건은 없었다.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이 일본의 국제법적 권리라고 인정했는데 한일 갈등을 감안, 외교적 발언이라도 할 법했지만 그조차 하지 않았다. 안보와 과거사를 분리 대응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겠지만 미국이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 정서를 고려한 흔적은 별로 없다. 한미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거나 미국이 미일관계를 더 중시한다거나 하는 생각들, 혹은 정권이 바뀐 뒤 이런 일이 빚어졌다는 섭섭함이나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워싱턴발 기사에서 이처럼 한미관계가 더 중하다고 오해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단어가 린치핀(linchpin)과 코너스톤(cornerstone)이 아닐까 싶다. 두 단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에게 한국은 린치핀, 일본은 코너스톤이라고 말한 뒤 미국이 양국을 공식 언급할 때마다 붙이는 외교 수사다. 10월 말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 "한국은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전의 린치핀"이라고 말 것도 이런 차원이다.
린치핀은 바퀴 축에 꽂는 핀으로 핵심축을 말하고 코너스톤은 건물을 받치는 주춧돌을 가리킨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양국 모두를 중요 동맹으로 여긴다는 뜻이 강하다. 그런데도 한국어 어감상 주춧돌보다 핵심축이 더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는 게 오해의 시작이었다. 미국이 과거 일본을 비유할 때 사용하던 린치핀을 나중에 한국에 적용한 것 역시 미국이 한국을 더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고 있다는 듣기 좋은 해석을 유행시켰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 컨설턴트에 따르면 코너스톤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중심에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되는 빛나는 존재의 의미로 쓰이고 린치핀은 중요하고 필수적이면서도 가운데 있다는 위치에 비중이 실린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 어감이나 쓰임새로 볼 때 린치핀이 코너스톤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공식 문서에서 코너스톤과 린치핀을 수식하는 표현을 보아도 분명해 보인다. 상원 국방위원회가 4월 발표한 한국ㆍ일본ㆍ독일 관련 보고서는 미일동맹을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계속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관여를 위한 주춧돌"이라고 했다. 한미동맹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대북 대처 능력 이 두 가지의 중심"이라고 했는데 린치핀과 같은 의미의 센트럴(central)을 사용했다. 대체로 미국에게 일본은 아시아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이고 한국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동맹이라는 의미가 된다.
정말 웃지 못할 일은 미국 관리들이 두 단어의 상징성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미국이 문서에 한미 관계를 코너스톤으로 표현해 린치핀으로 수정해달라 요청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외교용어는 그때그때 다르게 사용하니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애초 미국의 외교적 유행어에 비교의 잣대를 갖다 대고 마음대로 해석한 게 무리였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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