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는 스스로를 사유해야신인 땐 '나'없이 연출자에만 얽매여극중 인물이 지닌 내면 제대로 표현 못해자신의 습관·생각 관찰 우선이 중요● 요즘 세태에 생기는 우려뮤지컬 무대 위 무선 마이크 보편화로젊은 배우들의 화술 어그러져억양·띄어 읽기 등 무대 언어 반성 필요● 새로운 도전 위해 늘 고민"배우라면 한가지 역할에 10개 표현 준비"연출가인 사위 새 제안에 늘 흔쾌히 승락딸 현아씨도 일반인 위한 연극 활동 선두
"연극의 목적이란…(중략)…그 시대, 그 시절의 양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일세." 셰익스피어의 중 한 구절이다. 사이버의 기치 아래 인간은 축출되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에 더욱 절실해지는 명제다. 연극 배우 전무송(73)씨는 배우이자 작가인 딸 현아(42), 아역 배우 출신의 연출가인 사위 김진만(44) 씨 등과 함께 부천시의 'A & B 연기 학원'을 지키며 이 시대 연극의 의미를 새기고 있다. 높게(Above), 멀리(Beyond) 나가는 연극 정신을 생각하며, 이들은 진일보 중이다.
그들이 배우를 꿈꾸는 수강생들에게 전하는 것은 '인간 되기'라는 문제다. 인간을 흉내 내는 것으로 모자라 결국에는 인간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사이버 문명의 시대, 그것은 반시대적 몸짓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로 통하는 길로 객석을 인도할 때, 비로소 배우의 존재 의의가 살아 난다는 사실을 각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배우, 정확히는 연극 배우가 왜 특별한 존재인지를.
최근 지방 순회의 막을 내린 연극 '아버지', KBS TV의 드라마 '지성이면 감천' 출연 등 강행군이 막 끝나자마자 호된 병이 덮쳐 달포를 앓은 전무송씨의 얼굴이 조금은 핼쑥하다.'세일즈맨의 죽음'을 각색한 '아버지'는 이순재씨와의 더블 캐스팅이었다. "그 형님도, 나도 무지하게 익숙한 무대죠. 젊은 시절에나 어울릴 (연기)경쟁보다는, 각자가 극중 상황에 따른 차별성을 이제는 긍정하게 돼요." 1980년대 주인공 윌리 로먼으로 섰던 작품이다. 당시는 아들의 입장에서 보는 아버지를 연기했다면 이제는 아버지의 입장이다.
"이 놈의 자식들이 애비를 정말 몰라 주는구나 라는 심정이 절로 들었죠." 그래서일까, 옆에서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딸과 사위가 한결 소중하다. 두 사람이 연극이라는 기나긴 여울에서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서서히 열매 맺어 온 배우의 꿈이 만개한 것이다.
1981년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에서 연기한 지산 스님은 진정한 자유를 선사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비로소 해방된 연기를 하고 있음을, 그것이 연극을 통해 이룬 수행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착과 고민에서 벗어나 여유가 생기면 세상을 바르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게 된다."그 덕에 얻게 된 '배우론'이다. 하나같이 기 센 사람들만 모인 연극판에서의 초년병 시절이 절로 떠오른다.
"무대의 잔뼈가 어느 정도 굵어지기 전까지는 연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71년의 난해한 부조리극 '생일 파티'(해럴드 핀터 작)에서는 당대 연극판의 거물 유덕형 연출의 생각에 엮여 갔다. 연출자의 눈에 들지 못해 낙심천만했던 기억만 남았고,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자살까지 눈앞에 어른댔다. 첫 공연 뒤 신문은 "아류를 못 벗어난 연기"라며 들쑤시다, 끝날 무렵 "전무송은 곧 스탠리(주역)"라는 호평으로 애꿎은 죽음을 막았다. 물론 연극이 고급스런 문화의 대명사로 자연스레 인식되던 때의 풍경이다.
원로라는 호칭이 낯설지 않게 된 이제, 그의 배우론도 한층 무르익었다. 연출이 원하는 인물상에 얽매이지 말고, 그 인물이 지니고 있는 내면을 인지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배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이 극중 배역을 의식적으로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배역에)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오리무중에 빠진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려 고민하는 역설에 빠졌다.'고도를 기다리며' 등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일련의 작품들에서 확인된 관조의 경지가 그래서 나왔다. 작가가 제시한 세계에 다다르기 위해 배우가 걸어야 하는 길을 알기에 이번에 그가 연기한 로먼은 아예 전무송이었다. 배우란 그래서 영원한 학생이고, 부단히 진보하는 존재다.
"익히 알고 있는 아버지의 지론이죠." 딸이 말을 받았다. 그녀의 수업은 먼저 학생들에게 자신의 습관과 생각을 관찰하라는 주문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나와 캐릭터 사이의 중도적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이다. 몰입도, 동일시도 아니다, 그저 대본만 막연히, 무지하게 들여다 봤던 옛날은 후배들에게 연기 코치의 수준이었지만 그 같은 깨달음 뒤에는 배우 수업의 가장 큰 부분으로 관찰을 강조하게 됐다. "극중 인물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투여하는 각고의 애정이죠." 그 무기가 배우의 사유라는 점은 부친과의 차별점이다. 세 개의 계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이론이다.
1998년 교포 작가 스가고 헤이의 '뜨거운 바다'는 배우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연출 방식에서 커다란 인식적 전환을 경험하게 했다. 바로 "진정한 내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무대를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이다. 배우들은 텍스트 혹은 연출의 지시에만 매달리기 십상이었는데 작자이자 연출자인 그는 직접 배우들을 세세히 관찰한 다음, 각 배우의 특성에 맞춰 창작했다."작품을 입혀줬다"는 독특한 표현에는 전현아의 당시 경이감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가 배우들 각자를 면밀히 관찰한 다음, 대사를 주고 마침내 앙상블을 이뤄냈다. 열흘 만에 이뤄낸 그 무대를 통해 전현아는 육체를 너머 관념에서도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2011년의 1인극'쉬반의 전설'은 연극이 준 선물이었다. 신발 26개를 배치해 가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준 동화 구연 형식의 청소년극에서 신발의 미묘한 움직임에 따라 특정 인물이 살아나는 마술이 펼쳐졌다. 특히 영국인 작가와 독일인 연출가가 함께 작업했던 그 작품에 국내 연극계가 보낸 특별한 관심은 외국인들이 판소리 창법과 동작을 연극의 도구로 구사한 데 대한 경탄이었다. "해 온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무대예요."
한편 자신에게 1998년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연극상 신인상을 안겨 줬던 극단 신화의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는 또 다른 의미로 각별하다. 어찌 보면 연출자 김영수씨의 덕이다. "나를 집요하게 엄청나게 닦달했죠."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 역에 진정으로 빠져들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감사했다. 1년 지방 공연이라는 덤까지 챙겼다.
아역 배우 출신의 남편 진만씨 역시 리얼리즘이 가장 편하다. "배우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일상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배우들은 자연스레 텍스트에 집착하죠." 연출자는 숨고, 배우가 보이는 무대에 대한 말이다.
이들의 연극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이 시대 무대 예술의 총아, 뮤지컬로 향했다. "뮤지컬은 쇼다." 진만 씨의 쾌도난마다. 뮤지컬은 미국에서 대공황기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양상은 더하다. "무대 위에 서는 배우들이 언어에 대한 수업이 없어 억양, 띄어 읽기 등이 전혀 '비현실적'이지만 그에 대한 반성도, 비판도 전혀 없어요." 무대 위에서의 언어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통념마저 따랐으니 가히 점입가경. "요즘 '연극적'이란 말은 과장된 표현에 쓰이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을 가리키는 말이죠."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통설이 여기서는 제값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숫제 주객 전도다. 뮤지컬 연습장에서 당연시되는 "평상시처럼, 자연스럽게"라는 요구는 장구한 세월 동안 연극이 축적해 온 관습을 백안시하고 싶어 하는 속셈을 반영한다고 했다. 뮤지컬은 그래서 연극과는 다른'예술 상품'이라는 것이다. 현아씨는 "노래와 노래 사이에 짧게 등장하는 일반 대화에서는 미국식의 과장된 억양이 보편화하는 추세"라며 "명료한 발음을 뭉개는 무선 마이크가 보편화하면서 더욱 심각해진 문제"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뮤지컬 계에서는 "왜 연극 무대처럼 얘기해?"라는 지청구가 당연시 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같은 태도가 연극계 내부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전무송 등 장년 배우들이 "요즘 배우들은 화술이 어그러졌다"며 개탄한다. 어떤 이들은 숫제 뮤지컬을 가리켜 "나쁜 연극"이라고까지 치부한다.
진만씨는 요즘 관객의 욕망을, 한창 인기 끌고 있는 미국의 영상물 'American Funniest Home Video'에 비겼다."마구 웃고 나면 아무 것도 안 남는 시트콤에 대한 열광 같은 거죠." 그 비판은 "공연, 드라마에는 개연성 있는 삶이 전제돼야 한다"는 당위론을 깔고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순치시켜 가는 웃음과 욕망이란 코드의 본질이 연극이라는 렌즈를 통해 새삼 드러난 셈이다.
"뭘 주문하건 장인 어른은 제 의도를 따르세요. 바로 다음 날 딴 주문을 해도 또 해 주시죠." '상당한 가족' '보물' 등이 그래서 나왔다고 감사한다. 기다렸다는 듯 전무송씨는 "영화를 하면서 다양한 표현 방식의 연출에 따르게 됐다"며 "한 가지 역에 대해 열 가지는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이라고 자신의 배우론을 피력했다. 그 사위에 그 장인이다. 한편 현아씨는 대학로 연극센터가 마련한 일반인들을 위한 연극 교육 프로그램 '연극투어'의 진행자로도 활동 중이다. 오지혜(원로 배우 오현경의 딸), 김혜란 등 두 여배우의 뒤를 잇는 그의 발길은 이 시대 연극인의 사회적 책무를 웅변해 준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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