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예약을 한다. 보험증서의 보장 조건을 체크한다. 치료 내역과 처방 기록이 담긴 자료를 챙긴다. 간단한 옷가지를 가방에 넣는다.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선다. 그리고, 공항으로 간다.
머잖아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될 것이다. 치료를 목적으로 국제선 비행기에 오르는 건 재벌 회장이나 희귀 난치병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인식이다. 그러나 질병 치료 혹은 건강 증진이라는 목적 앞에 이미 국경은 사라졌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선 자국의 높은 의료비 때문에, 영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에선 긴 대기시간을 참을 수 없어서,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에선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찾아 미련 없이 다른 나라로 향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환자(혹은 웰니스 트래블러(Wellness Traveler))들이 떠나가는 나라이거나, 찾아오는 나라이거나.
정부는 지난 26일 의료관광호텔(메디텔)업을 신설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관광진흥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연간 환자수 1,000명(서울은 3,000명) 이상을 유치한 의료기관, 또는 환자 500명 이상을 유치한 유치업자는 내국인 투숙객 비중이 40%를 넘지 않는 조건으로 메디텔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부작용도 예상된다. 메디텔이 지방 환자를 서울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거라는 우려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집중이 심해져 의료 서비스의 지역적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우려를 차치하면, 이번 시행령은 의료관광 확산이라는 국제적 흐름에 대응한 사실상 첫 번째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국제 회계법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세계인들이 의료관광시장에서 쓰는 돈은 2017년 79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의료관광객 유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바로 한국이 위치한 아시아. 미국 글로벌 전략 연구소 그레일리서치는 2009년 8개 나라를 의료관광의 '핵심 국가(Key Destination)'로 분류했는데 그 가운데 5개국이 태국,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이다.
관광대국인 태국의 경우 2011년 약 220만명의 의료관광객이 입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외래 관광객의 10% 규모이고 금액 비중으로 따지면 그보다 훨씬 크다. 서비스 내용은 성형과 라식 수술부터 장기체류 헬스케어 서비스까지 다양하다. 태국 정부는 비자면제 협정 대상국 이외의 국적을 가진 의료관광객이 입국할 경우 공항에서 도착비자를 발급해 준다. 또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이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으로 출장을 나가는 등 정성을 쏟고 있다. 방콕의 범룽랏병원은 한국어를 포함한 14개 언어로 진료를 하고 있는데, 이 병원 한 곳이 2010년 유치한 외국인 환자가 43만 7,000여명이다.
한국관광공사의 '2013 한국의료관광 총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한국의 외래 의료관광시장도 연평균 38%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방한 의료관광객은 총 188개국 15만 9,000여명. 숫자로 따지면 미국(1만3,976명), 일본(1만2,997명) 순이지만 증가율로 따지자면 러시아, 중국, 몽골 등이 눈에 띈다. 첨단 의료설비와 진료 기술을 갖추고도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이들에게 매력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세만 한국관광공사 의료사업단장은 "전세계 10억 관광인구 가운데 5.6% 정도가 의료관광객인데 한국을 찾는 관광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미치지 못한다"며 "정부와 관광업계뿐 아니라 병원들도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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