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고교를 졸업한 뒤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며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세무 변호 일 등을 하며 오로지 돈 벌기에만 치중하다 우연찮게 민주화 운동에 발을 디뎠다는 언급이 이어지면 그가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누구나 아는 인물의 허다하게 거론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재미 있을까. '변호인'은 익숙한 이야기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음을 웅변한다.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 시절을 뼈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입혔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실제 사건을 변형해 다뤘지만 허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막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나선 송우석(송강호)은 남들은 거들떠보지 않던 부동산 등기 일 등을 하며 동료 변호사들의 배척을 받는다. 학연은 없고 전관예우에는 관심 없는 그는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부를 쌓아간다. 학생 시위 등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다. 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그는 "공부하기 싫어서 지랄병 떠는 것 아니야?… 데모로 세상을 바꿔?"라고 반문한다. 자조적으로 "속물 세법 변호사"라 자칭하던 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국밥집 주인 아들 진우(임시완)가 용공 조작 사건에 얽히면서 삶의 중대 기로에 선다.
우석이 성공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전반부는 경쾌하다. 세련된 연출이 상업영화로서 손색없는 안정적인 화술을 보여준다. 당대의 어두운 세태를 슬쩍 비추지만 속도감 있는 연출과 유머 넘치는 대사들이 웃음을 불러낸다. 20세기 한국의 풍경을 복원하며 관객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장면도 여럿 있다. 천정 위를 달리는 쥐들에게 고양이 소리를 내는 우석 부부, 흑백 화면 속 코미디언 배삼룡의 모습 등은 우리 부모 세대들이 과거에 두고 온 풍경이다.
후반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둡다. 경찰이 진우에게 가하는 고문 장면과 치열한 법정 싸움이 교차한다. 검사의 우격다짐식 신문과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우석의 외로운 싸움이 길게 이어진다. 눈물을 자아내고 감동을 주는 순간도 있으나 예상 가능한 이야기 전개라서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카메라는 엄혹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을 집중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들을 술집으로 끌고가 잘 나가는 변호사로 허세를 부리던 우석에게 그의 친구는 울분을 터트리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진다. "이제 제일 못 믿을 게 방송이고 신문이다". 국가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린 피고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석에게 사람들은 '빨갱이'라며 달걀을 던진다. 경찰 수뇌부는 고문 경찰 차동영 경감(곽도원)을 부산에 보내기 전 가진 술자리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부산에서 광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차 경감이 잘해야 해. 그게 애국이야."
영화의 매력은 상당 부분 배우들의 호연에서 온다. 검찰이 불온서적이라 간주한 책들을 밤새 읽고 선배 변호사를 찾은 우석이 던지는 질문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는 송강호이기에 더 큰 울림을 갖는다. 누명 쓴 아들을 구하려는 순애역의 김영애, 권위주의적인 판사를 연기한 송용창, 넉살 좋은 사무장으로 변한 오달수, 뼛속까지 악인인 듯한 곽도원의 연기도 두루 좋다. 양우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1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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