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으로 입원했던 아빠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진단을 받은 지 겨우 보름 만이었다. 아빠의 일흔여덟 해, 생의 흔적은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아빠의 마지막 밤, 나는 병실에 머물고 있었다. 식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아빠에게 호소했다.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아빠가 사랑하는 이들이 지금 오고 있다고. 엄마와 막내가 도착하고, 얼마 후 장남이 달려왔다.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하는 순간, 아빠는 눈을 번쩍 뜨셨다. 가족에게 임종을 지키지 못한 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아빠는 꺼져가는 생명의 기운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 아빠의 호흡이 곧 잦아들었다. 생을 놓은 아빠의 얼굴은 뜻밖에도 편안해보였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가까운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예상 밖의 얼굴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이십년 만에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으니. 덕분에 아빠의 마지막 가는 길이 그리 쓸쓸하지는 않았다. 늘 바깥을 떠도느라 가까운 이의 경조사도 챙기지 못하고 살아온 나였기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밀려들었다. 결혼식에는 가지 않아도 장례식에는 간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포개어 주는 이들이 있어 떠나는 이의 발걸음도, 남겨진 이들의 슬픔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게 아닐까.
장례를 치르고 나니 그제야 아빠의 빈자리가 실감났다. 삼우제를 지낸 다음날,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첫눈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첫눈이 내리면 설레기만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날에 아빠는 혼자 얼마나 쓸쓸하고 추울까. 하루 종일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눈물은 시와 때도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터진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빠의 부재로 인한 통증에 시달릴 것이다. 아빠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 때, 아빠가 남긴 유품을 보게 될 때, 아빠와 뒷모습이 비슷한 이와 마주칠 때, 날씨가 사나워질 때…. 혼자서 세상을 돌아다니느라 아빠에게 무심했던 만큼 후회도 길게 남을 것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평생 외로웠던 아빠. 구멍가게를 하며 말년의 이십오 년을 보낸 아빠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남편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책임감에 눌려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아빠의 생이 가여웠다. 시골에서 화초를 키우며 소일하는 노년을 갈망했는데 그조차 이루지 못하고 떠나다니…, 허무하고 또 허무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랬다. 아빠는 가족을 통해 당신 삶을 이루신 거라고. 그 작은 구멍가게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일상의 행복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 정말 그랬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일상을 버리고 떠난 내가 놓친 것들이 분명 그 안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엄마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차례로 쳐서 일흔다섯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뿌듯했을 것이다. 혼자 가게를 지킬 때면 "대학생 네 엄마 때문에 내가 늘그막에 고생이 많지"라고 투정하는 아빠의 말투에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으니까. 부모는 어떤 자식에게서도 반드시 자랑스러움을 찾아낸다는데, 나처럼 불효막심한 딸에게서도 아빠는 기특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새 책을 낼 때면 가게에 책을 쌓아놓고 손님들에게 자랑하던 아빠였으니까. 자식들이 이룬 것, 아내가 이룬 것을 아빠는 당신이 일구어낸 것으로 믿으셨으리라.
살아오는 동안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는 내 질문에 아빠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다 행복했는데, 그래도 네 엄마 만난 일이 제일 좋았지." 아빠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삶은 없다는 것을 아빠가 내게 깨우쳐 주었다.
자식도 없이 죽음을 맞게 될 나는 생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내게 될까. 삶이라는 긴 여행의 마지막 순간까지 부디 잃지 말기를. 원하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해도, 보고 싶었던 풍경을 보지 못해도 언제나 웃고 있던, 여행지에서의 내 모습을.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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