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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1월 29일] 당겨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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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1월 29일] 당겨야 온다

입력
2013.11.2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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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넘치는 일인가. 시간 앞에서 돈 앞에서도 그리 쩔쩔매지 않으며 당당하게 그럴 수 있다면. 아마도 어쩌면 인류의 공통된 꿈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며칠 전 굉장한 영화를 보았다. 돈 없이 유럽에 가서 일 년 동안을 지내다 온 네 명의 젊은 친구들이 자신들의 여정을 기록한 영화 이다. 무일푼에다, 그것도 유럽인데, 일 년이라. 아마도 이 영화를 보기 전의 사람이라면 '에이,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거짓말이 아니라면 거지 같았겠군'이라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완벽한 여행을 목격한 적이 없다. 신나게 부딪치고, 능청스럽게 헤매며, 폼 나게 너덜거린다. 영화를 보는 동안, 과연 이 주인공들은 도대체 청춘이라는 의미를 어찌 알고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청춘이면서 감히 청춘의 속살을 제대로 파헤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청춘이라는 녀석의 속성은 그 시간을 한참을 지나고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데 있다. 당시로서는 만질 수 없고 실감할 수 없으며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 청춘이라는 녀석이어서 나중에 재활용해볼까 하고 꺼냈을 땐 이미 다 바스러져 소용없게 돼버린 것이 청춘이지 않은가 말이다.

일 년 동안 조각조각 촬영한 60시간 분량을 편집해서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는 사실이 대단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대신 시종 영화 안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따라가게 한다는 사실에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그 질문에 끄덕끄덕하다가, 대답할 것을 찾다가, 숙연해지기도 하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삶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이 영화가 발칙한 것은 '우리 이만큼이나 고생했어요'라거나 '우리 이 정도면 조금 멋지죠?' 하는 으스댐도 우쭐함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다 할 포장도 과장도 없어서 생짜인 주인공들의 상황과 내면에 동조하고 마는 입장이 된다. 그저 닥치는 대로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으로 연명하는 시간의 덩어리들을, 그저 소중히 끌어당기듯 놓지 않으며, 그들은 그렇게 일 년을 살았다.

시간은 그냥 오지 않는다. 당겨야 온다. 그런 것처럼 하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사랑도, 의미도 모두 당겨야 가능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당김으로 서서히 온다. 당겨지지 않으면 조금 더 한걸음 나아가 기다리는 것, 그것도 자연스러운 당김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또 다른 의미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주 먼 곳에 두고 온 뭔가를 희미하게나마 찾아내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열쇠를 잃어버려서 오래 열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서랍을 열게 된 기분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제목에서 밝힌 대로 '잉여'도 아니며, 청춘을 지나는 이들도 아니며 차라리 이 시대의 '어른'이다. 어른을 흔들어 놓고 있으니 어른들의 비겁을 뒤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충분히 어른이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어떤 성과를 내보인 것으로 그치지 않는 모양이다. 이 주인공들은 인생의 한 과정에 있다, 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곧 다시 뭉쳐 먼 길을 떠날 것이라 한다. 그것이 기적(奇蹟)의 기행(奇行)이 될 거라 의심치 않으며 나는 응원하고 또 응원하겠다.

많은 시간을, 뭔가를 하고 싶은 최소한의 욕망을 말뚝에 매어 두고 사는 이. 부디 이 영화를 보시라. 우리가 돈 때문에 얼마나 저지르지 못하고 비겁하게 살고 있는지를 눈 감고 모른 척하는 이. 이 영화 앞에서 얼굴 붉어지시라. 극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스스로에게 빚을 많이 지고 사는 사람일수록, 꿈틀거리고 차오르고 먹먹해져서 잠시 발을 헛디딜 수도 있을 것이니 조심하시라.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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