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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11월 29일] 유산이 된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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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11월 29일] 유산이 된 김장

입력
2013.11.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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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토요일에 김장을 하는데 다른 약속이 없냐고 물으신다. 주중에 혼자 해놓고 가져가라 할까 하다가 어린 손주들에게 김장하는 걸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전화를 하셨단다. "김장을 할 테니 와서 도우라" 당당히 말씀하셔도 될 것을 맞벌이하는 자식 내외 눈치를 보는 듯해 죄송스러웠다. 배추 절이기가 힘들 테니 절인배추를 사자 했더니, 값이 몇 배인데 하시며 이미 배추도 들여놓았다 하신다. 김장할 때 가장 힘든 게 배추 절이기와 양념 준비일 텐데. 모든 게 준비된 그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저 버무리기 쇼를 하러 어머니댁을 찾았다.

넉넉지 않던 시절, 겨울나기는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겨울을 맞기 전 세가지만 들여 놓으면 맘 편히 발을 뻗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루 귀퉁이에 쌀 서너 가마 들여놓고, 광에 가득 연탄을 채워놓고, 마당에 김장독 서너 개 묻어 놓기만 하면 된다고. 어린 육남매를 데리고 버틸 겨울엔 그 세가지가 꼭 필요했지만, 매번 그 세가지를 채워 넣기가 힘에 부치셨다고 했다.

김장 김치는 소소한 반찬이 아니라 겨울을 보낼 귀중한 양식이었다. 여럿이 모여 마당 가득 배추와 무, 양념들을 늘어놓고 시끌벅적 김장을 하는 건 배고프지 않은 겨울을 맞을 수 있다는 기쁨의 축제였고, 추운 겨울을 탈 없이 나자는 기원의 의식이었다. 어떤 이들은 노란 배추 고갱이를 뜯어 뻘건 양념을 돌돌 싸서 먹는 그 맛 때문에 김장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일년에 단 한번 김장하는 그때만 맛 볼 수 있는 것이라며. 따로 보관한 배추 속과 양념이 서너 시간만 지나도 그 맛의 신선함을 잃는 건, 김장하는 순간의 왁자지껄한 축제 분위기를 담지 못해서일 것이라며.

서로 더 많이 담그겠다던 아이들도 막상 일이 시작되니 금세 지쳤고, 아내의 얼굴에서도 신이 난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아내의 얼굴을 읽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슬쩍슬쩍 아내와 아이들 눈치를 보는 듯했다. 고작 반나절의 일을 끝내고 노동 이상의 결과물을 챙겨 들고 집으로 향할 때 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어머니는 또 며칠 혼자 몸살을 앓으실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 친구 엄마들이 모이는 자리에 낄 기회가 생겼다. 저녁을 먹는다기에 동네 보쌈집을 추천했더니 다들 김장한지 얼마 안됐다며 냄새도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1박 2일 시골 시댁에 내려가 밭에서 배추 뽑기부터 시작해 400포기의 집안 김장을 담갔다는 엄마도 있었고, 달랑 10포기 조금 넘는 배추를 놓고 시누이와 동서네까지 네 집이 모여 북적대기만 했던 엄마도 있었다.

허리가 아프도록 일을 한 엄마나, 가족 모일 구실의 '이벤트 김장'을 하고 온 엄마나 모두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그만 두시면 자기 힘으론 김장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가득 쌓인 배추더미와 홀로 싸움할 자신이 없단다. 어머니 세대가 있어 아직 우리의 일상으로 남은 김장도 이제 조만간 추억으로 남겨질 듯하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김장문화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한다고 한다. 내달 초 정식 등재가 결정되는데 사전심사에서 권고됐던 것이 본심에서 탈락한 사례가 없다니 기대해도 좋겠다. 이제까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것들은 판소리 처용무 단오제 영산재 줄타기 등이 있다. 모두 소중한 것들이지만 유독 김장이 특별한 건, 남 일이 아닌 내 일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의 직접 경험이 세계 유산이 된다는 건 분명 기꺼운 일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유산이 됐다는 건 그것이 곧 사멸화할 위기에 처했음을 공식 인정받았다는 또 다른 이야기일 터. 김장을 유산의 권좌 위, 박제화를 통해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40여 년 길들여진 어머니 손맛을 놓치고 싶진 않은데, 아내에게 김장을 전수받으라 권할 만큼 간이 크지 않으니, 결국 스스로 나서야 할 것 같다. 내년 김장부턴 꼼꼼히 그 비법을 전수받아야겠다. 유네스코도 인정한, 내겐 너무도 소중한 그 유산 말이다.

국제부 이성원 차장대우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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