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월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통해 '박근혜식 균형외교'의 표본을 보여줬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중국은 북한의 추가 핵실험에 결연히 반대한다"는 보다 분명한 입장을 이끌어 냈다.
이와 달리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해서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아태자유무역지대(FTAAT)라는 큰 강을 향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TPP 같은 다양한 지류가 나가야 한다"며 명확한 판단을 보류했다. TPP가 중국이 구심점인 RCEP와 아태 지역의 경제질서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을 감안해 포괄적 의미의 자유무역체제에서 경제통합의 해법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균형외교의 출발점은 상대국과 적정한 거리를 두는데 있다. 미중 두 강대국 사이에서 섣불리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두 국가들에 대한 설득을 강화해 한국의 발언권을 높여가려는 구상이다.
균형외교 전략은 경제적 상호 의존도는 높아지는데 반해 영토 분쟁, 역사 문제 등 정치ㆍ안보 갈등이 커지고 있는 '아시아 패러독스(Asia Paradox)'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낮은 수준에서의 협력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역내 걸림돌을 제거해야 모든 국가와 관계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명박정부가 한미관계에 치우쳤다면, 박 대통령이 취임 후 9개월 동안 시 주석과 무려 3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것만 봐도 한중관계의 밀도는 진했다.
미중 갈등이 심각하지 않을 때는 이러한 박근혜식 균형외교가 실리외교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중간 힘겨루기가 격화하고 영유권 분쟁과 해묵은 과거사 논쟁, 북한 핵문제 등 강성 이슈가 역내 질서를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균형외교를 꽃피울 여력이 없다. 자칫 미중 갈등이 무력시위 양상으로 치달을 경우 한국은 '미중 패러독스'에 갇힐 우려가 적지 않다. 한국은 국제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미국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우리 대외 교역량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다. 지난해 한중 교역량은 2,150억달러에 달했으나, 한미 교역량은 절반도 못 미치는 1,018억달러에 불과했다. 양자택일을 강요 받는 '샌드위치 외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미 정부 당국자들이 최근 일본의 집단자위권 문제 등과 관련, 한국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런 일단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3일 "미국은 한일 갈등이 불거진 직후에는 일본 책임론을 지지하는 기류가 강했지만 최근엔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마치 작은 보트 위에 두 발을 얹고 있는 형국"이라며 "등거리 외교에 집착하다 보니 미국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전혀 못했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눈을 돌려 보면 미중 대립이 심화하는 와중에 중국이 경제력을 무기로 우리 측을 압박할 경우 압력 수위를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교역량이 지금보다 크게 적었던 2002년 중국산 마늘 수입관세 인상에 따른 한중 통상분쟁 당시에도 한국은 사실상 두 손을 들고 중국측 요구를 수용했다.
전문가들은 패권다툼이 벌어진 동북아의 상황악화에 대비하려면 한일관계 개선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여전히 동북아의 핵심 고리인 일본의 존재를 인정해야 역내 조정자 역할을 자임할 입지가 넓어진다는 논리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정부가 미국이라는 끈을 느슨하게 한 바람에 미중 사이에서 더 꽉 눌린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며 "과거사를 배제한 순수 안보의 관점에서 일본의 이용가치를 고민해 보려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사정원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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