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의 이름은, 나라에선 뭐라고 명칭을 붙이고 바꿔 불러왔든, 다순구미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곳이란 뜻. 전라도 억양으로 따순금이라고도 한다. 한자론 따뜻할 온자에 비단 금자, 온금동이다. 동네는 유달산 남쪽 자락, 길쭉하게 누운 고하도를 마주한 양지바른 곳에, 늙어서 더는 짖는 것도 귀찮은 누렁이마냥 무심히 엎드려 목포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동네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기억이 곱게 빻은 가루처럼 쌓여 있어서, 좁은 골목길 발을 딛는 곳마다 시간의 금빛 먼지가 인다. 동네는 곧 사라진다.
온금동은 도시재정비 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철거를 목전에 둔 도시의 낡은 얼굴이 으레 그렇듯 이곳도 처연하다. 바스라져내리는 벽, 자연 암반 위에 시멘트 껍질처럼 붙어 있는 계단, 한 통의 페인트를 두세 집 나눠 썼음이 분명한 슬레이트 지붕, 출구가 없을 것 같은 모퉁이에서 다시 이어지는 골목…. 다순구미에 다른 게 있다면 바람일 것이다. 갯내를 묻힌 바람이 25층 아파트 조감도를 붙여 놓은 동네 초입에서부터 불어 올라올 작시면, 다순구미는 처녀적 이난영이 노래 부르던 시절 뱃사람들의 흥성한 체취를 다시 몸에 감는다.
수백 년 된 산제당 터가 남아 있지만 다순구미의 100년 이상 된 기록은 변변치 않다. 목포가 개항된 건 1897년. 전엔 나주에 속한 작은 포구가 목포였다. 산비탈에 돋은 조그마한 마을의 희로애락은 갯벌에 묻힐 뿐이었다. 그러나 개항 뒤 동네의 모습은 사뭇 달라진다. 압해도, 조도, 노화도 등 인근 섬의 어민들이 목포로 몰려들면서 배를 대기 편한 이 동네에 집들이 늘어갔다. 고화도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동네 앞엔 작은 만이 있었는데 1924년 지게로 돌과 흙을 날라 부두도 만들었다. 삼면을 막고 한 면만 열어 놓은 모습이 언청이 같다고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 부두는 1981년 소년체전을 앞두고 도로를 확장한답시고 없애버리고 말았다.
1938년 동네엔 거대한 시멘트 벽과 굴뚝이 들어섰다. 벽돌을 만드는 공장으로 당시엔 대단한 규모의 산업시설이었다. 공장은 한국전쟁 때 가루가 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재건돼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10여 년 전 공장은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겨가고 을씨년스러운 풍경만 이곳에 남겼다. 다순구미는 다시 궁벽한 뱃사람들의 마을로 돌아왔다. 연안어업이 영 신통치 않아져서 어쩌면 개항 이전의 쓸쓸하고 가난했던 다순구미로 돌아왔다. 공장 주변엔 트럭을 드나들게 하느라 길을 넓게 냈는데, 차도 사람도 뜸한 그 길에서 지금 주민들이 쭈그리고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김선태의 시를 옮겨 적는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죽을 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조금새끼')
본론이 많이 늦어졌다. 목포 여행을 떠났다면 반나절 짬을 내 다순구미에 들러보면 좋을 것이다. 대도시의 달동네에선 기대하기 힘든 어떤 '짠함', 말하자면 바다에 발을 담근 축축한 생의 풍경을 이곳에선 아직 목격할 수 있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가로로 금을 그은 고갯길을 걷다 보면, 연탄과 쌀이 주 품목인 동네 구판장, 30여년 전 수리하며 남긴 기록이 아직 뚜렷한 우물, 수평선을 이마 밑에 두고 잠드는 사람들의 순박한 눈빛을 만나게 된다. 머잖아 이곳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째보가 잊혀졌듯, 다순구미라는 이름도 사라질 것이다. 낡고 추레하다는 이유로 갈아 엎어버린 수많은 소중한 이름 더미 속에, 온금동의 이름도 묻힐 것이다.
목포=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