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피아노를 '남자의 악기'라 했던가. 남자의 연주는 힘, 여자의 연주는 섬세함이 특징이라는 단정은 적어도 이 연주자에게는 명백한 오류다.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의 독주회는 단단한 테크닉에 기반한 기예에 가까운 담대하고 빠른 연주로 '건반 위의 여검투사'라는 별명의 이유를 밝힌 자리였다.
저녁 8시에 시작된 연주회는 준비한 레퍼토리만으로도 3시간을 훌쩍 넘겨 밤 11시 20분께 끝났다. '빅 리사이틀'이라는 공연명에 걸맞게 라흐마니노프의 6개의 전주곡,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 베토벤 소나타 7번 '열정', 쇼팽의 8개의 녹턴,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 등 화려한 기교가 특징인 낭만주의 음악 위주로 풍성하게 구성했다.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작품번호 32의 5번으로 잔잔하게 시작하는가 싶더니 180㎝ 장신의 이 여성 피아니스트는 전주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번호 23의 5번에서부터 서서히 시동을 거는 듯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중간 휴식 후 3부에서 리스트의 곡을 연주할 때는 속주 부분에서 손가락의 움직임이 안 보일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례적인 장시간의 피아노 리사이틀이기에 앙코르곡을 기대하지 않았던 관객들은 로비에서 있을 사인회를 위해 서둘러 객석을 떠날 채비를 했지만 리시차는 첫 무대 인사 후 곧장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리스트 편곡)를 들려 주고 퇴장하는가 싶더니 두 번째 무대 인사 후 다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로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연주의 정확성이나 적절한 감정 절제 여부에서는 호오가 갈릴 수 있는 연주자지만 힘과 속도로 무장한 리시차의 연주가 이날 관객을 완벽히 홀린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공연은 사인회를 포함해 새벽 1시가 다 돼서야 완전히 마무리됐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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