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단계부터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를 심자는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초기 흥행에 유리하니까 많은 관계자들이 적극 동의했다. 워낙 완고한 제작자 때문에 캐스팅이 무산돼 아쉽기만 하다."
최근 개봉한 한 국내영화의 마케팅 담당자 말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출신은 요즘 영화 마케팅에 필수"라고도 밝혔다.
아이돌이 충무로에서도 대세다. TV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잡은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들이 속속 주요 배역들을 꿰차면서 충무로도 호령할 태세다. 걸그룹 미쓰에이의 수지('건축학개론')와 빅뱅의 탑('포화 속으로)이 아이돌의 가능성을 비친 뒤 아이돌 출신들을 캐스팅한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아이돌 그룹이 배우들 몸값을 올렸다는 볼멘 소리가 나올 정도다. 새로운 별을 갈망하는 충무로에 활력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아이돌 배우에 매달리는 '묻지마 캐스팅'이 영화산업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있다.
아이돌 바람은 지난해부터 거셌다. '건축학개론'과 '26년'(2AM의 슬옹) '자칼이 온다'(JYJ의 영웅재중) '돈 크라이 마미'(유키스의 동호) '회사원'(제국의 아이들의 동준) 등이 극장에 걸렸다. 올해도 여전하다. 올 가을만 해도 '동창생'과 '배우는 배우다'(엠블랙의 이준) '결혼 전야'(2PM의 택연) '노브레싱'(소녀시대의 유리)이 흥행 전선에 뛰어들었다. 올 겨울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변호인'에는 시완(제국의 아이들)이 얼굴을 비춘다. 내년 개봉 예정으로 봉준호 감독이 제작하는 '해무'에선 JYJ의 유천이 엔딩 크레딧의 윗자리를 차지한다.
충무로가 최근 아이돌 배우들을 편애하는 표면적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돌 배우들의 뜨거운 인기가 영화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흥행 대전에서 스타를 앞세우면 기선 제압에 유리하다는 게 극장가의 속설이다. 지난 6일 개봉한 '동창생'은 아이돌 효과의 대표적 사례다. 탑을 남파 공작원으로 꾸민 이 영화는 개봉 첫 주 53만 8,329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누적 관객 수(25일 기준 103만 5,192명)의 절반을 넘는 관객이 개봉 4일 동안에 몰린 것이다. 영화계에선 "탑이 없었다면 '동창생'의 관객 수는 이보다 적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아이돌 배우들이 마케팅에 유용하다지만 이들이 나온 영화의 흥행 성적은 썩 시원치 않다. 올해의 경우 보이그룹 2PM의 준호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감시자들'(550만5,192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상업적으로 낙제점을 받았다. '감시자들'을 제작한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는 "아이돌 이미지가 너무 강한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면 영화에 되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결국 영화의 완성도가 장기 흥행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아이돌=흥행' 공식은 일종의 착시 효과에서 비롯됐다는 강한 비판도 적지 않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아이돌 배우 때문에 영화가 잘 알려지고 흥행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영화 관객은 TV 드라마와 달리 돈을 지불하고 극장을 찾기에 가수활동 이상의 것을 보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엄용훈 삼거리픽쳐스는 대표는 "아이돌 배우 캐스팅이 해외 시장 개척에 이점이 있지만 국내 시장에선 아직 큰 이익을 안겨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흥행 외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론하는 목소리도 높다. 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은 여느 신인보다 기본적인 훈련이 돼 있다. 영화산업을 위해 이들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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