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하이옌으로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된 필리핀 반타얀 섬. 25일 임시진료소가 차려진 반타얀시립병원 앞마당은 진료 개시를 한 시간 앞둔 오전 7시부터 환자 500여명으로 가득 찼다. 다리가 부러지고 밭은 기침을 쏟아내는 환자들은 깨진 타일이 섞인 흙바닥에 앉아 신음하고 있었다.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지 보름이 넘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아비규환이다.
반타얀시에 따르면 재산 피해는 37억 페소(한화 895억원)에 달하지만 시설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사망자만 24명, 부상자는 정확한 집계도 어려워 수 천명에 달할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다. 섬의 유일한 의료기관으로 의사 한 명이 상주하던 시립병원도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 천장이 뜯겨나가 폐허에 가까웠다.
23일 의사 6명, 간호사 3명, 의료지원인력 3명 등 12명으로 구성된 경희의료원 해외봉사단이 재난 발생 후 세계 처음으로 이곳을 찾기 전까지 환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반타얀은 레이테주(州) 타클로반과 오르목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덜 알려진 탓에 구호의 손길이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봉사단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부서진 집기들을 들어내고 응급 복구작업을 벌여 진료실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약국 등으로 진료소를 꾸렸다. 조중생 봉사단장(이비인후과 교수)은 "필리핀 제1병원인 세인트룩스병원의 요청으로 이곳에 오게 됐다"며 "가뜩이나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태풍이 와 피해가 더 커진 듯하다"고 말했다.
봉사단은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 팀을 두 개로 쪼개 한 팀은 시립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나머지 한 팀은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면 규모의 마을 바랑가이를 순회하고 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진료를 할 수 없는 일몰 전까지 하루 평균 12시간씩 700여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강행군 중이다. 김호중 이비인후과 전공의는 "현지 상황이 전해들은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며 "특히 열악한 위생 탓에 기생충 감염으로 표피 밑에 혹이 생긴 환자들이 많아 이틀동안 12명을 수술했다"고 말했다.
시립병원 앞에서 다섯 살 남자아이를 안고 있던 헬렌 벨라스크(29ㆍ여)씨는 "막내(5개월) 아들을 들쳐 업고 집을 뛰쳐나오자마자 벽이 쓰러졌고, 뒤늦게 나오던 큰 아들은 머리에 무엇인가를 맞고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며 태풍이 몰아쳤던 8일의 긴박한 순간을 설명했다. 그는 "돈도 없고 병원도 멀어 치료할 수 없었다"며 "아이의 상처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웠다"고 말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에도 2시간을 기다렸다는 알리오 카푸라스(12)군은 "태풍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비를 맞은 8명 가족 전원이 감기를 2주 넘게 앓고 있다"면서 "치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기다리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곳 진료소를 찾아 올 수 있는 주민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전날 바랑가이 오코이에 이어 바랑가이 바오의 어린이 환자들을 진료한 이경석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두 바랑가이에서 진료한 환자 400여명 중 8세 이하 어린 아동이 50%에 이른다"며 "질병도 문제지만 아이들의 영양 결핍이 무엇보다 심각하다"고 말했다.
오후 1시쯤 순회진료소로 70대 할머니가 아들에게 업혀 들어왔다. 자전거에 받혀 무릎 뼈가 부러진 중상이었다. 아직 진흙이 마르지 않은 부목과 슬리퍼, 급한 대로 상처를 휘휘 둘러 감은 천 조각이 긴박했던 사고 당시를 드러냈다. 할머니는 작은 트럭에 실려 시립병원으로 후송됐다. 김선영 가정의학과 교수는 "순회진료소를 찾은 환자 중 부상이 심한 환자들은 시립병원으로 후송해 치료하고 있다. 자포자기하던 환자들이 안도의 미소를 보일 때가 가장 보람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봉사단의 활동만으로 현지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기에는 역부족이다. 제임스 나하로우 반타얀 시립병원장은 "저소득층이 90%인 바랑가이 주민들은 도심 병원까지 왕복 200페소(한화 4,800원)의 교통비를 낼 수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데, 봉사단의 순회진료가 큰 힘이 됐다"며 "여전히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아 외부 의료지원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필리핀 반타얀=김관진기자 spiri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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