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그 일 년 후 5월에 나온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은 하급심 판결까지 파기해 가며 한걸음 더 나갔다. 단순히 정부가 대일협상에 나서기를 주문하는 걸 넘어 해당 일본기업의 국내자산을 일방적으로 집행할 수도 있는 길을 터놓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이 타협의 예술인 외교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외교의 사법화'를 우려하며 그 이유로 헌재와 대법원 사이의 뿌리 깊은 알력에서 기인한 대중추수적인 인기경합을 거론하기도 한다. 허나 일이 여기까지 온 데는 외교정책을 담당한 행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15년 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래 세 번에 걸친 정권교체를 살아남은 '미래지향의 한일관계'. 그 장밋빛 구호 아래 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한 진지한 자구노력이 부족했음은 헌재의 2011년 판결에서도 확인된다. 작금의 '외교의 사법화' 현상은 역대 정부의 안이한 역사인식이 초래한 측면이 크다.
이렇듯 '외교의 사법화'를 자초한 정부가 입법부 일에는 발 벗고 나서 '정치의 사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물론 정부의 정당해산 위헌신청에 법적, 절차적 하자는 없다. 많은 국민들이 통합진보당이 국시에 반하고 국헌을 위배한 정당이라고 판단하고 있음직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사람들조차 상당수는 통진당 해산이 그토록 다급한 국정과제인지에 대해선 반신반의하고 있다. 이석기 사건의 1심 판결이 나오기도 전이다. 더구나 현 정부 발등에 떨어진 다른 급한 불들을 생각해 보면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인지 더욱 더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명분 외엔 비전도 복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국제적으로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 대일외교는 그런 긴박한 현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외교의 사법화'가 심화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앞가림에도 바빠야 할 행정부가 주도하는 작금의 '정치의 사법화', 하지만 그 빌미를 제공한 건 입법부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 가진 평균적 상식에 비추어 볼 때 통진당이 10% 정당득표율에 6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을 배출하게 된 19대 총선결과는 민의의 충실한 반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같은 표심의 왜곡이 생긴 데는 야권연대라는 이름의 얄팍한 선거공학이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대로다. '정치의 사법화'를 자초한다는 점에선 '국회선진화법'을 없던 일로 하겠다며 지금 이 순간도 헌재 쪽을 곁눈질하고 있는 여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결국 정치와 외교의 사법화가 행정부를 돌고 입법부를 돌아 사법부에게 숙제로 넘어왔다. 사법부로서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정부나 국회가 앞 다투며 법원에 부담을 전가하는 작금의 무책임한 행태는 분명 바로잡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정치나 외교적 사안에 대한 사법적 개입이 필경 '사법의 정치화'를 낳고 궁극에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법부라도 먼저 정치와 외교의 사법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연방대법원의 소위 "정치사안 독트린" (Political Questions Doctrine)을 연구해 봄직하다. 가깝게는 일본 최고재판소가 이 독트린을 원용하여 평화헌법 9조 해석에 관해 내놓은 판례들도 있다. 외국의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사법부 본연의 임무인 권리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 고도의 정치적, 외교적 사안에 있어서는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데 있다. '사법정의'는 '적극주의'와 '소극주의'의 양 날개로 난다는 그 역설의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외교와 정치가 줄줄이 법정에 섰다. 재판의 계절을 맞아 우리 사법부의 밝은 눈과 깊은 속에 거는 기대가 높다.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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