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복고풍의 시대다. TV는 1990년대의 뜨거웠던 대중문화를 반추하는 데 여념이 없고 패션계는 벌써 10년째 70~80년대 옷차림에 열광하고 있다. 21세기는 어디로 갔을까? 2000년대에 들어서 우리가 거둔 문화의 열매는 아무 것도 없는가.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일찌감치 미래를 상실한 현재는, 이제 생생한 과거에 제자리를 잠식 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썼다. 20세기의 수확물을 단물이 빠지도록 씹어 먹으며 근근이 버티는 21세기 인류를 그는 '좀비'라고 불렀다. 왜 우리는 좀비가 됐을까. 기성세대의 우려처럼 주야장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다가 창작력을 몽땅 잃은 것일까. 발전을 멈춘 사회가 창작의 의지까지 말려버렸다는 말은 핑계인가.
여기에 답을 해줄, 아니 고민을 더해줄 공간이 생겼다. 영등포역과 신도림역 사이, 텅 빈 상가와 사창가 한가운데 29일 문을 여는 전시공간 커먼센터다. 78년생 함영준씨가 또래 작가 3명(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 김형재, 작가 이은우)과 함께 운영하는 커먼센터는 2000년대 들어 활동을 시작한 소위 '88만원 세대'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곳이다. 과거 한국 작가들이 '민중미술 세대', '추상미술 세대'로 각각 명명되고 해석된 것과 달리, 요즘의 작가들을 부르는 이름이나 작품에 대한 조명은 전무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90년대 말까지는 한국 미술이 활발했어요. 하지만 불황이 계속되고 미술시장이 죽으면서 이후의 작업들, 작가들에 대해서는 미술사가 인식하기 힘듭니다. 지금 한국의 문화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이들인데도 말이죠. 커먼센터는 21세기의 문화상을 미술이라는 키워드로 수집해 보여주는 곳입니다. 당대 사람들의 작품을 통해 '요즘은 이런 세상이에요'라고 알려주는 거죠."
커먼센터 디렉터 함영준은 내년 기획 전시 중 하나로 B급 문화에서 파생된 회화 작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만화, 영화 등 대중문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 B급 문화가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존 미술계 구조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작품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평가해줄 동시대 기획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함씨의 생각이다. 지금 영향력을 가진 국내 비평가나 기획자는 대부분 40~50대. 커먼센터는 이들이 '희한한 그림' 이란 딱지를 붙인 뒤 한쪽으로 치워버린 작품들로 전시를 열 예정이다.
힙스터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벨기에 맥주, 독립 출판물, 스냅 사진, 소규모로 생산되는 음반과 문구 등 주류화하지 않은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힙스터들은 2000년 이후 청년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회화, 사진, 조각, 미디어 아트를 모아서 보여주는 것이 커먼센터의 몫이다. "주요 현상으로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 이론적 토대를 구축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거죠."
함씨가 이런 공간을 기획한 이유 중 하나는 책임감이다. 나이로 치면 '88만원 세대'의 형님 격인 그가 바라본 젊은 작가들의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다. 미대 졸업생은 한 해에 14만 명씩 쏟아져 나오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미술관이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시에 응모하거나 정부 문화재단이 주는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삶. 기금을 받기 위해 프레젠테이션 자료에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스마트'나 '힐링' 같은 단어를 써가며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끼리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를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커먼센터다. 작가들이 기획과 전시를 모두 맡으며 판매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90년대 말 기존 화랑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대안공간이 비영리를 표방했다면, '영리 목적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운영비는 벌자'는 태도가 차이라면 차이다. 현재 4명인 운영위원은 향후 7~8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요즘 아이돌 가수들은 가창력을 인정 받기 위해 자기 노래가 아니라 원로 가수의 노래를 불러요. 자기 세대의 문화를 신뢰하지 않고 위 세대로부터 권위를 빌려오는 거죠. 현재의 한계와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쪼그라들어 있어요. 커먼센터는 이들을 향해 '너희가 최고야'라고 말하거나, 기성세대에게 '우리를 책임지라'고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의 상황을 거울처럼 비추는 오늘의 미술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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