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소비자 정보지로는 소비자시민모임이 만드는 '소비자리포트'(회원용)와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한국소비자원이 발간하는 '소비자시대'(2,000원, 1만2,000부)가 있다. 하지만 이 정보지의 구독자는 고사하고 존재 자체를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정보의 양과 품질 문제일 수도 있고, 돈을 주고 정보를 사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한국 소비자 성향 탓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 3월 한국소비자원은, 소비자시대와는 별개로, 웹 기반 무료 정보포털 '스마트컨슈머(www.smartconsumer.go.kr)'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스마트컨슈머는 과연 한국판 '컨슈머리포트'가 될 수 있을까.
지난 13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한국소비자원 2층 AV모니터실. 123㎡(37.4평) 시험실 바닥에는 블랙박스 상자 155개가 쌓여 있었다. 벽을 따라 모니터와 선반, 시험 도구가 가득했고, 어디선가 발전기 소리도 '웅~'들려 왔다. 시험분석국 서정남 팀장은 가로세로 선들로 빽빽한 중앙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블랙박스 시야각 측정기입니다. 문방구에서 모눈종이를 사서 직접 도배했죠. 볼품 없지만 이곳은 국내 유일의 차량용 블랙박스 품질 검사소입니다."
이틀 전인 11일. 한국소비자원은 스마트컨슈머에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31개 차량용 블랙박스의 영상품질, 진동 내구성 등 11개 항목의 품질 비교정보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제품의 68%가 한국산업표준(KS)에 못 미쳤다. 홈페이지는 당일 오전 접속자가 폭주해 마비됐고, 13일에는 최단기간 누적 조회수 10만 건을 돌파했다.
검사 기간은 건당 약 3~6개월, 검사 항목은 학계와 업계 의견, KS 기준을 참고해 결정한다. 발표 전 해당 기업에 조사 결과를 통보하고 이의 신청을 받는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만에 하나 있을 실수로 기업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며 "지금껏 이의 신청은 단 건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산된 정보는 기업 광고나 파워블로거, 포털사이트의 소비자 댓글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소비자에게 안전하고 합리적인 제품 구매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서정남 팀장은 "기업은 폭염에 블랙박스 내부 메모리카드가 녹아 내리거나 충격을 받으면 떨어진다는 정보는 주지 않는다"며 "블랙박스 시장은 수많은 업체가 난립해 있지만 제대로 된 품질 정보가 없다. 이번 보고서는 소비자의 제품 선택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계 역시 뚜렷하다. 스마트컨슈머는 월 2회 특정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 품질 정보를 비교하는 '비교공감'과 수시로 소비자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일반 비교정보'를 제공한다. 이 중 비교공감이 한국판 컨슈머리포트로, 소비자시민모임, 금융소비자연맹 등 10개 소비자단체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거기에 공정위가 배정한 예산은 지난 해 7억 9,000만원, 올해는 50% 증가한 12억 원이었다. 한 제품을 조사하는 데는 약 3,000만~6,000만원이 투입된다. 그런 만큼 자동차처럼 고가 제품은 애당초 엄두를 못 낸다. 거의 매달 자동차 성능비교를 하는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그 시험에 투입하는 비용만 연간 약 2,100만달러(약 234억원). 올해 스마트컨슈머 전체 예산의 20배 규모다. 스마트컨슈머가 한해 생산하는 비교공감 정보는 12개, 미국 컨슈머리포트는 매달 그 만큼의 정보를 싣는다. 스마트컨슈머는 그나마 전수조사도 어렵다. 블랙박스만 해도 시중에 유통 중인 300여 종 가운데 소위 '잘 나가는'31개 제품만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덜 알려졌지만 가격과 품질이 뛰어난 무명 제품이 주목 받을 기회는 드물다.
부산 해운대구에 본사를 둔 기저귀 생산업체 '오보소'는 그 드문 기회로 진가가 확인된 업체다. 지난해 5월 스마트컨슈머는 기저귀 품질 비교 평가에서 '오보소 프리미엄'(개당 224원)이 하기스(371원)나 수입제품 팸퍼스(456원)보다 흡수시간과 순간흡수율 면에서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7억원 대였던 오보소의 월 매출은 한 달새 10억원 대를 넘어섰다.
운영 방식도 고민해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컨슈머리포트가 제품 평가 후 점수를 매겨 품질 순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반면, 스마트컨슈머는 가격대비 품질을 언급하는 수준이다. 한 마디로 흐릿하고 소극적이다. 의료나 금융서비스처럼 소비자 스스로 평가하기 힘든 분야도 인력 부족과 평가상의 어려움으로 지난해 4월 금융소비자연맹이 주도한 변액연금보험 수익률 평가 단 한차례에 그쳤다. 독일 '테스트(TEST)'가 금융, 대기업 사회적 공헌, 체육 시설에 대한 과감한 평가 등으로 시민의 신뢰와 호응을 얻어온 것과 대비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산업분석팀 김기랑 팀장은 "공공기관 특유의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소비자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의 욕구를 빠르게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지난 8월 8일 서울 종로구 서울YWCA 사무실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날 서울YWCA 소비자환경팀은 10개 아웃도어브랜드 10개 품목의 국가별 가격 비교 결과를 발표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 30%인 일본 브랜드 스노우피크 텐트가 일본 온라인몰 가격의 2배 수준인 148만원에 팔린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의 원성이 빗발쳤고, 스노우피크사는 즉각 제품 가격을 15% 인하했다. 공정위는 이 조사에 1,950만원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직원 2명이 이룬 성과였다. 양선희 소비자환경부장은 "원가 정보를 제공한 업체도, 결과 간담회에 응한 업체도 전무했다. 가격 인하는 소비자의 힘으로 이룬 성과였다"고 말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스마트컨슈머가 소비자 권익 증진, 기업 견제라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예산과 인력 투자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예산을 갑자기 늘리긴 어렵다. 내년 예산도 올해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지용 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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