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산책] 이토록 매혹적인 가정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산책] 이토록 매혹적인 가정법

입력
2013.11.22 18:31
0 0

존 레논과 체 게바라가 마주 보며 기타를 함께 연주하는 사진이 트위터를 떠돌았다. 한 사람은 노래로 또 한 사람은 총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헌신했기에, 이들의 만남은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이 둘이 언제 어디서 만났는가에 관하여 갖가지 억측이 나왔다. 합주하며 부른 노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삶의 행적을 따르자면 '이매진'이나 '워킹 클래스 히어로'가 어울리지만,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후 존 레논이 발표한 곡들이기에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진은 합성된 것이고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속았다고 화를 내는 이보다 사실이 아님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더 많았다.

나도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갔으되 만나지 못한 이들을 상상으로 얽어 맨 적이 있다. 라는 장편소설에서다. 신라의 학승 혜초는 천축국 순례를 마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진입하여 쿠처에 이른다.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가 바로 이 쿠처를 지키는 당나라 장수였다. 문헌에는 두 사람이 만난 기록이 전혀 없지만, 나는 그들이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끝내 화해하는 이야기를 짰다. 국경 너머를 떠도는 승려와 국경을 지키는 장수,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과 나라 잃은 고구려인이 모래 바람 날리는 사막 도시에서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왜 이런 만남들을 허구로 만들어 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근사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위함이다. 역사와 역사소설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역사에선 가정법이 성립하기 어렵지만 역사소설은 가정법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뿐만 아니라 장소와 장소의 어울림에도 가정법을 적용할 수 있다. 대도시를 한 그루 나무로 바꾸겠다고 나선다면? 디자이너 이장섭은 '컴플렉스 시티 프로젝트(Complex City Project)'를 통해 대도시의 복잡함을 자연으로 치환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서울, 파리, 모스크바, 로마 등 세계적인 대도시의 지도를 펼쳐놓고, 촘촘히 뒤죽박죽 섞인 크고 작은 길들을 줄기와 가지와 잎으로 삼아 다양한 나무 그림을 완성시킨 것이다. 교통체증과 뒤엉킨 전선, 바삐 거리를 오가는 군중과 그들이 기거하는 아파트 단지 등 복잡함이 주는 대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내뿜는 나무라는 긍정적인 생명체로 순식간에 탈바꿈한다. 이장섭의 입장에 서면 책상은 책상이 아니고 도시는 도시가 아니며 나무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은 결코 만난 적이 없으며, 이 나무 그림은 사실 서울이라는 인구 천 만의 대도시 지도라고 밝힌다 해도, 가정법을 통한 상상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어떤 상상이 주목을 받고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인간들의 갈망과 아쉬움이 녹아 흐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존 레논과 체 게바라는 눈빛을 나누며 합주한 적이 없지만,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체 게바라는 체코 프라하의 아파트에서 '비틀즈'라는 시까지 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태차를 마시며 / 휴대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 비틀즈의 노래를 듣는다 / 저 음표 어딘가에 /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 이유가 숨어 있으리라.' 그 날 체 게바라가 들은 노래는 '예스터데이'였다. 그는 이 명곡을 들으면서 쿠바 혁명을 위해 멕시코에서 탔던 배 그란마(Granma)와 뚫고 나갔던 밀림들을 추억했다. 합성 사진을 만든 이도 이런 교감에 근거하여 아름다운 상상을 한 장의 사진에 담은 것이리라.

이장섭은 인류에게 시적인 상상이 필요한 이유를 이탈리아 작가 칼비노를 빌어 설명했다. 눈앞의 현실이 지옥처럼 힘들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절망하지 말고 그 안에서 천국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지금 누구누구가 만나는 상상을 하고 싶은가. 왜 하필 그 두 사람인가. 이토록 매혹적인 가정법은 과연 당신을 치유하는 약일까 마비시키는 독일까.

김탁환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