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가득하게 엮어낸 슬픔, 그 속에서 발견한 따뜻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가득하게 엮어낸 슬픔, 그 속에서 발견한 따뜻함

입력
2013.11.22 13:07
0 0

은 "무지무지 천천히 사는 사람"인 김소연(46)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올해로 등단 20년째니 5년에 한 권꼴, 과작이다. 오래 농축돼서일까. 시집 뒤에 실린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발문 속 "너의 새 시집이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같은 구절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의 시를 읽으며 독자가 크게 동요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슬픔의 원인으로는 무엇이 지적되어야 하는가.

"나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사연들로 나를 애타게 하는 누군가들.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다만 그들의 슬픔과 나 사이엔 어쩔 수 없이 거리가 발생하니까, 더 곡진하게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게 예의니까. 그래서 좀 더 슬퍼졌던 것 아닐까?" 존재의 거처와 거기에 배어있는 이야기들을 읽는 데 홀려 있다는 시인을 앞에 두고 그저 시집 속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았다. 그는 마치 그 구절들이 질문인 것처럼 무언가를 말했다.

'이미 이해한 세계는 떠나야 한다 마치 고향처럼/ 이미 이해한 사람을 떠나듯이 마치 부모처럼// …떠나도 떠나도 고향이 너무 많아서/ 당나귀처럼 귀가 땅에 닿는다'('식구들' 중)

"진정하게 깊이 있는 이해라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는 프레임이니까. 프레임에 이해한 세계를 가둬두고 싶지 않다. 떠난다는 건 버린다기보다 해방시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나 너 이해해'란 말, 나는 하지 않는다."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주동자' 중)

"한진중공업 사태가 마음 속의 오랜 숙제였다. 당시 희망버스의 주동자로 송경동 시인이 체포됐는데, 배후가 누구냐는 그들의 물음에 시로 답하고 싶었다. 저는 참여시인도 못되고 비겁함 때문인지 '한진' '크레인' 그런 단어를 쓰지도 못했다. 다만 최소한의 양심에 의한 태도였고, 그것들에 의해 마음에 파란이 일었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게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반대말' 중)

"반대말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에 반대말이 없는 단어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컵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떠올라 쓴 시다. 컵, 모자, 우편함까지 찾고는 '반대말이 없어서 너희는 참 행복하겠다' 생각하던 차에 시인도 반대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그래서' 중)

"다들 슬프다고 하는데, 실은 아주 평화로운 순간에 쓴 시다. 그리스 크레타 섬의 시골 어촌 마을에서 혼자 에게해를 바라보며 지낼 때, 너무 행복해서 글이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좋다, 좋다, 혼자 탄성만 내뱉다가 지중해의 이 보송보송한 날씨가 내 슬픔마저 다 말려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순간 갑자기 말할 수 없이 슬퍼졌다. 나는 얼마간의 슬픔이 필요한 인간이었던 거다."

'나는 소식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식'('망원동' 중)

"나는 부재중 전화가 두렵다. 친구, 가족들과 주로 문자로 얘기를 하다 보니 그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무슨 일이 터졌나 가슴부터 철렁한다. 망원동은 내가 자란 동네인데, 망원시장이 아직까지도 안 변하고 있는 모습들이 있더라. 그런 걸 보면 참 반갑다."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걸리버' 중)

"이미지나 감각 없이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한다. 산문에서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얘기 좀 들어봐'가 아니라 '이것 봐봐' 하는 사람."

'같은 악몽을 사이좋게 꾸던/ 같은 소원을 사이좋게 버리던'('실패의 장소' 중)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 모양을 갖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에서'('정말 정말 좋았다' 중)

"시집을 묶기 전에는 너무 비관적일까 봐 걱정했는데 묶으면서 보니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덜 부끄러웠달까. 기어이 따뜻한 것, 사랑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려고 내가 참 애썼구나…."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김주성기자 poe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