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기가 다가오니 더 마음이 아프더군요. 3년이라는 시간은 서당개가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많은 걸 터득할 수 있는 긴 시간인데 하루 같이 지나갔어요. 형이 전사했을 때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가 어느덧 고3이 됐더라고요."
2010년 11월 23일 낮 12시. 고(故) 서정우 하사(당시 병장)는 어머니 김오복(53)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휴가 나가요." 전역까지 불과 27일 남겨두고 나가는 '말년 휴가'였다. 이 통화가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던 서 하사는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대하다 북한의 포격을 맞고 유명을 달리했다. 22세였다.
김씨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아들을 잃은 뒤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글을 쓰고 있다. 피격 한 달여 후인 2010년 12월 25일 쓰기 시작해 3년째다. 현재 광주광역시 한 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 김씨는 21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제(20일) 마지막 글을 썼다"고 했다.
김씨가 '서정우 이야기'를 쓰도록 만든 건 북한을 향한 원망과 억울함이었다. "대학에 다녀야 할 아이가, 아무 잘못도 없이 흔적이 없어졌어요. 아름다운 세상 즐기지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제 아들이요. 그 마음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흔적이라도 남기는 게 어미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A4 용지로 350쪽이 넘는 글엔 서 하사가 21년을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고스란히 담겼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아쉬움, 그리움과 함께다.
김씨는 22일 서 하사의 모교였던 단국대 천안캠퍼스를 찾는다. 이 대학 해병대군사학과에 생기는 '서정우 강의실'의 현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북한의 도발에 희생된 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에 감사한다"며 "강의실을 지날 때마다 학생들이 누구도 북한 도발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마음가짐과 안보의식을 되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쟁(政爭)에 대해 김씨는 "대한민국의 생명선인 NLL을 지키는 장병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가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은 확고하다. 그는 "사과 받을 건 받고 도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 대화를 하든 해야 생명을 걸고 싸우다 희생된 장병의 넋이 위로를 받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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