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온 1987년 가을. 수강하던 전공과목 중간고사에 '한국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갈등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기술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당시 어떻게 답안을 써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성적이 썩 훌륭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뤄 모범 답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진보 학계의 거목이었던 교수님이 직선제 개헌과 함께 달아오른 그 해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되는 이유와 현실을 학문적 고민으로 풀어보려 했던 것 아닌가 반추해 볼뿐이다.
4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지역 갈등이라는 해묵은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도리어 그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여타 갈등 요인과 함께 얽혀 복잡해지는 모습이다. 국가 상부 구조인 헌법기관의 생태계 분포를 보면 더욱 그렇다.
국회 대통령 행정부 감사원 법원 헌법재판소 순으로 헌법에 기재된 헌법기구 수장의 면면에서 지역 다양성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다. 강창희(대전) 국회의장을 제외하면 박근혜(대구) 대통령, 정홍원(경남) 국무총리, 황찬현(경남) 감사원장 후보자, 양승태(부산) 대법원장, 박한철(부산) 헌재소장 등 모두가 영남 출신이다. 17개 행정부처 장관 가운데 호남 출신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등 2명에 불과하다.
헌법기관장 인사의 지역 편중은 국민통합을 저해하는데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탕평 약속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박 대통령은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만들고 초대 위원장에 호남 출신이자 동교동계의 거물인 한광옥씨를 기용함으로써 지역갈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양성의 결핍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편중 인사는 우연의 일치"라고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있다.
갈등의 최종 심판자로 여전히 국민적 신망이 높은 법원과 헌법재판소로 시야를 넓히면 지역 편중에 학맥 쏠림까지 겹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헌재의 경우 박 소장을 비롯한 재판관 9명 가운데 영남 출신이 5명을 차지하고 있다. 호남 출신은 김이수(전북) 재판관이 유일하다. 대법원은 지역 편중은 덜 하지만 학맥 쏠림이 문제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서울대 법대 출신이 11명이다. 최종심인 대법원 재판을 최고 엘리트에게 맡겨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배려라면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서울법대 동문회'라는 비판에서 한시라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국가 상부 구조를 하나의 생태계로 본다면 '종 다양성'은 상실되고 편식증에 걸린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도 '끼리끼리 동종교배'는 열성 유전자의 증식으로 귀결되는 법이다. 쏠림 현상으로 인한 다양성의 결핍은 결국 불균형과 부조화로 생태계를 해치게 된다.
획일적인 상부 구조가 우려스러운 것도 그 쏠림 현상 때문이다. 지역으로 편중되고 학맥으로 뭉친 상부 구조가 사회담론을 일방으로 폭주시키는 토대가 된다면 가히 재앙이 아니겠는가. 마침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부터 국가정보원이 전면에 나서고, 선거로 도태시킬 수 있는 '종북 정당'의 해산을 헌재에 청구하는 공안 정국이 조성되고 있는 판국이라 다양성을 상실한 상부 구조가 자칫 제동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는 하지만 인권단체 주변에서는 "이런 분위기라면 사형집행 논란도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유신 시절 사형선고를 받았던 민주당 유인태 의원은 "17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된 마당이라 가능성은 낮지만 우려스럽다"면서 "대통령이 사형집행 중단을 확실히 약속하면 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역대 대통령(이명박 전 대통령 제외)들은 집권 첫해 종교ㆍ인권단체 지도자들을 만나 사형폐지를 건의받고 확답을 건넸는데 박 대통령은 아직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곤 정치부 차장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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