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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건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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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건배사

입력
2013.11.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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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하순, 송년모임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나도 벌써 두 건의 송년모임을 치렀다. 해마다 겪는 일이긴 하지만 송년모임은 어떤 사람들과 만나더라도 끝나고 나면 좀 쓸쓸해진다. 흥겹게 놀다가 ‘잔치’가 끝나고 나면 오히려 허전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가 든 탓일 것이다.

하기야 젊은 시절에는 송년회나 망년회라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 모임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 1년이 가거나 오는 것을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이제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 것이다. 세월은 나이만큼, 그러니까 20대에는 시속 20km, 30대에는 30km로 가다가 60, 70대에는 60km, 70km로 빠르게 간다던가?

그렇게 연말 모임이 시작되는 것과 때맞춰 1주일 전쯤 어느 선배가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우님 잘 계시지? 웃기는 이야기나 좋은 건배사 있으면 알려주삼.” 연말 모임에서 써먹을 말을 좀 알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연초에 건배사에 관한 글을 여러 번 쓴 데다 웃기는 이야기를 남들보다는 좀 많이 아는 걸로 소문이 나서 나에게 그런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이야기는 몇 가지 알려줄 수 있었지만 좋은 건배사, 그러니까 새로운 건배사가 없어 결국 답장을 해주지 못했다.

사실 건배사에 관한 글을 쓴 다음부터 어느 자리, 어느 모임에 가든 건배사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 좀 괴로웠다. 늘 새로운 건배사로 자리를 흥겹게 만들면 좋겠지만 바로 그 자리에 맞는 건배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며칠 전 고등학교 선ㆍ후배들의 모임이 파한 뒤 2차로 한잔 더 할 때 돌아가며 후배들에게 건배사를 하나씩 해보라고 주문한 일이 있다. 역시 짐작대로 다 내가 아는 건배사였다. 내 딴엔 새것을 좀 섭취하려고 한 건데, 하는 작태가 뻐언했다.

이런 식이었다. “영어로 건배사 하겠습니다.” 이건 보나마나 “원 샷!"이다. 영어로 말하는 척하면서 술을 단숨에 다 마시라고 하는 건배사인데, 벌써 ‘신라 때’ 나온 건배사다. 불어로 건배사를 하겠다는 녀석이 있기에 ”아, 그거 마셔부러 그런 거지?“ 하고 내가 먼저 말을 잘라버렸다(참 못됐다!), 불어인 척하는 이 전라도 말투의 건배사도 이미 신라 때 나온 거다. 스페인 말로 하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그의 건배사는 ”살루트!“였다.

그날 10여 명이 건배사를 외쳤지만 나에게 새로운 건 당최 하나도 없었다. “소취하 당취평!”을 외치는 녀석이 박수를 많이 받았지만, 그것도 버얼써 신라 때 나온 건배사 아닌가. “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행복하지만(즐겁지만) 당신에게 취하면 평생 행복하다(즐겁다)”는 뜻이다. 중국어로 건배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말이다.

그날 내가 처음 들은 건배사는 “SS, KK"였다. 나에게 문자 메시지로 새로운 건배사를 요청했던 선배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었는지 1차 모임 때 그 말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부부모임에서 쓸 만한 건배사라고 주장했다. SS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KK는 까라면 깐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자가 SS하고 외치면 남자는 KK라고 화답하라는 것이다.

취지는 잘 알겠지만, 어쩐지 좀 어색하다. 요즘 부부 사이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아내가 어디 있겠어? 까라면 까는 남편은 더러(사실은 많이) 있겠지. 아, 그게 아닌가? 남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남편들에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시키는 말인가?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 아니라 재처(在妻)라는 세상이니 남편들이야 하라면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세상인가? 그 건배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좌우간 뭐 좀 새로운 건배사 없을까? 그날 내가 아는 것 몇 가지를 이야기해주었더니 그나마도 처음 들은 사람들이 박수치고 깔깔대며 좋아했는데, 이 사람들아, 그거 다아 신라 때 나온 건배사야. 그렇게 진도가 늦어서 어떡해? 좋은 머리 두었다가 뭐하누? 좀 새로운 걸 스스로 개발해보시게나.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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