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서울엔 첫눈이 내렸다. 드디어 겨울이 시작됐다. 주변을 본다. 굳이 힘을 주지 않으면 자연스레 움츠려드는 어깨. 모두 겨울이 되면 걷기 위해 최소한으로 몸을 펴고 있을 뿐 웅크린 사람들뿐이다. 아닌 척하지만 결국 겨울잠이 필요한 건 곰과 같은 동물만이 아닌듯 하다. 겨울은 어떤 종류의 게으름에도 '괜찮다'고 용서해줄 것만 같다.
호주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기 안. 예상대로 일행은 막 시작된 한국의 겨울 따위엔 안중에도 없었다. 당연하다. 그곳은 여름이니까. '액티비티의 천국' 호주에서는 당연히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의무라도 있는 듯 5박 6일의 여행 일정표만을 뒤적일 뿐이었다. 마침 미리 받은 공식 안내 책자의 첫머리에는 '신 나는 도시 시드니'라 적혀 있었다. '시드니로 오는 당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아야만 한다'는 얘기리라. 게으름과 권태는 시드니와 어울리지 않으니 한국의 겨울은 생각조차 말라는 일종의 경고 같기도 했다.
시드니의 아침은 아직 초여름인 탓인지 상쾌했다. 느끼한 저녁을 먹은 후 마시는 청량 음료 같았다. '높고 하얀 구름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만나는 곳'이라고 했던 영국 소설가 브루스 채트윈이 들으면 낡은 표현이라 욕하겠지만 하늘은 파랬고, 바람은 싱그러웠으며 지나는 여인들은 아름다웠다.
시드니 도심에서 동쪽으로 8㎞를 걸어 본다이 해변에 도착했다. 상쾌함은 절정에 달했다. 물론 본다이가 호주 최초로 수영복 윗옷을 입지 않는 '토플리스'를 허용한 곳이라서가 아니다. 원주민 말로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라는 뜻을 가진 해변답게, 파도 자체만으로도 보는 맛과 듣는 맛이 쏠쏠했다. 10㎞에 달하는 해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꿈 꾸는 듯한 표정이 이해할 만했다.
본다이 해변은 서핑으로 유명하다. 특히 파도가 과하지 않아 초보가 처음 나서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간혹 등장하는 상어 얘기가 있지만, 피해를 당하거나 상어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해변 저 멀리 상어의 접근을 막는 그물망이 튼튼하게 쳐 있다고 한다.
서퍼가 되기는 쉽다. 일단 보드에 엎드린 상태에서 두 팔로 저어 바다 먼 쪽으로 나가면 된다. 2m 정도 길이에 50㎝ 정도 폭인 보드는 생각보다 안전하다. 굳이 뒤집혀야지 하는 마음만 없다면 물속으로 들어갈 일은 없다.
파도가 오면 보드를 돌리고 몸 바로 뒤에 왔다 싶으면 '벌떡' 일어서면 된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보드는 자연스레 파도 위를 넘나들게 된다. 생각보다 빨리 파도를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게 서핑 고수들의 말이다.
물론 영화 '폭풍 속으로'의 키아누 리브스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까지는 애당초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고수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웠던 초보 시절을 애써 숨기기 마련이다. 파도에 맞고 넘어지고 1시간 정도 서핑을 배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가 부르게 된다. 짠 물이 뱃속에 가득한 것 하나. 저 멀리 진짜 서퍼들의 현란한 실력에 대한 부러움 둘. "그래도 잘했어요"라는 강습 코치의 말에 부끄러움 셋. 남는 것은 시큰거리는 손목과 허벅지의 고통, 그러나 당당히 서퍼 보드 위를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자신의 사진 한 장 정도가 되겠다.
한바탕 파도와의 전쟁을 벌이고 나면 이제 바다가 눈에 더 가까이 들어온다. 본다이 해변은 '세계 최대 야외 조각전'으로도 유명하다. 호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본다이의 절경을 전시장 삼아 'Sculpture by the Sea'을 매년 열고 있다. 1997년부터 올해로 17년째. 10월 말부터 11월 초여름이 막 시작될 때면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해변을 찾는다고 한다. 참고로 시드니의 인구가 400만명(2011년 현재) 정도다.
마침 올해 조각전에는 김승환, 안병철, 문병두 등 한국 작가 세 명도 작품을 냈다. 100여 개의 작품을 감상하려면 족히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가끔 저 멀리 손가락을 가리키며 "고래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그이의 손가락 끝을 보는 게 좋다.
시드니를 찾는 사람에게 '필수 코스' 중 하나인 포트스테판스 애너 베이. 시드니에서 동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차로 2시간 정도 200㎞를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이곳에는 40㎞에 달하는 해변과 함께 약 1㎞ 너비에 30㎞ 길이의 모래언덕이 있다. 사막이라고 부르기에는 '2%' 부족한 면이 있지만, 분명 이곳 사람들은 '사막'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샌드보드. 보드를 타고 말 그대로 모래 위를 활강하는 것이다. 인접한 넬슨 베이에서 카약을 타고 낙하산 같은 넓은 천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패러세일링을 한 뒤라면 스피드가 그리울 만도 할 테다.
그러나 그곳엔 낙타가 있었다. '잠깐, 낙타라고? 캥거루나 코알라가 아니고'라 할 수 있었지만, 바늘에 실이 가는 법. "사막에 낙타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800년대 중반, 신대륙의 문이 열리자 수 많은 탐험가가 호주로 낙타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무거운 짐도 거뜬할 튼튼한 네 다리는 물론이고, 돌이나 진흙탕을 걷는 데 낙타만큼 유용한 동물이 있었을 리 만무했으니 너도나도 낙타를 데리고 왔으리라. "호주에 철도를 놓는데 낙타 사육을 위해 중동 사람들이 많이 오기도 했는데 공사가 끝나고 낙타만 두고 사라진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처럼 누군 떠나고, 누군 야생으로 남거나 관광객을 태우고 사막을 걷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호주 사람들은 여전히 낙타를 '일하는 말(Work-horse)'이라고 부른다.
1840년 첫 번째 낙타가 호주대륙에 도착한 날, 시드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악당 해리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를 기념해 그 낙타에게는 '해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여전히 그 전통에 따라 호주 낙타들은 악당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태운 낙타는 연신 '푸륵'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토미'. 토미는 과연 어떤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었을까. 어쨌든 뚜벅뚜벅 사막을 걷고, 인접한 해안도 걷는 '낙타 투어'도 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 되겠다.
아. 시드니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외관을 빗대 '옷걸이'라 부르는 하버브리지 등반을 꼭 해보길 권한다. 1,321개에 달하는 계단을 걸어 59m 높이 정상에 오르면 시드니의 모든 곳이 보인다. 200 호주달러(20만원 정도)의 비싼 돈 때문에 주저하겠지만, 시드니는 분명 보면서 즐기는 곳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느끼는 도시다. 게다가 100세 노인도 등반한다고 하니, 무섭다는 핑계는 애초에 생각도 말자.
[여행수첩]
●대한항공을 이용하면 편안하게 시드니를 다녀올 수 있다. 인천에서 시드니까지 직항편이 매일(인천 출발 오후 7시5분, 시드니 출발 오전 8시 55분) 운항한다. 시드니까지는 대략 10시간이 걸린다. 시드니는 한국보다 1시간 빠르다. 서머타임제가 있는 10월 첫째 주 일요일부터 다음해 3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는 2시간이 빠르다. ●더 록스의 Argyle Street 모퉁이 더 록스 센터 2층 안내소에서 시드니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www.VisitNSW.com에도 쏠쏠한 정보가 많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www.131500.com.au를 방문해 볼 것. 뉴사우스웨일즈관광청(www.sydney.com) (02)752-4131 호주관광청(www.australia.com) 한국지사 (02)399-6500
시드니(호주)=글·사진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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