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견뎌야 할 괴로움의 연속이지만 생존의 희망은 뚜렷하다"고 말하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들은 쇠락의 계절에 더 큰 의미를 준다. 삶의 더께가 가을비 맞은 낙엽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 어깨가 무거워지다가도 "살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체호프의 문장들을 듣고 나면 짐짓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다. 늦가을 객석에서 바라보는 체호프는 기분 좋은 호사임이 분명하다.
평택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을 그린 연극 '일곱집매'로 상반기 공연계의 주목을 받았던 문삼화 연출이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체호프의 대표작 '세 자매'를 올린다. 체호프가 말년의 기력을 쏟아 부은 '세 자매'(1901년 작)는 시골 마을 군 간부의 유족인 세 딸과 아들 부부의 일상을 통해 인생에 잠재한 저마다의 아픔과 무게, 그리고 덧없는 희망의 종착점을 그려낸 고전 희곡이다. 체호프의 극작 가운데 인물 관계가 가장 복잡하면서 드라마적인 요소는 희박한, 그래서 국내 연출가들에겐 손대기 쉽지 않은 작품으로 알려진 게 바로 '세 자매'였다. 더구나 올 초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의 '세 자매'가 관객의 기억 속에 이른바 '체호프의 모범'으로 자리 한 직후라 문삼화 연출에게 이번 무대는 이만저만 어려운 도전이 아니다.
문삼화의 '세 자매'는 레프 도진이 국내 관객들에게 제공했던 '모범 답안'을 지워내기 위해 살아서 웃고 떠들며 펄떡이는 자매들을 불러냈다. 여기에 체호프를 좋아하는 국내 관객에겐 조금 낯선 코미디 요소를 버무렸다. 극의 마지막, 세 자매가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장면에선 배우들의 입꼬리를 끌어올려 희망이란 메시지가 더욱 명징하게 보이도록 했다. 더불어 레프 도진의 무대와 달리 학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무급 지방의회 의원으로 주저앉은 안드레이(오민석)의 몰락에 초점을 맞췄다. 마치 보류된 희망의 시대에서 막 뛰쳐나온 듯 가족과 겉도는 나타샤(김시영)의 부각은 "누구의 삶이라도 TV 아침 드라마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시쳇말이 떠오를 정도로 극의 긴장감을 부추긴다. 도진이 선보인 입체적인 무대구성을 통한 치밀함은 보이지 않지만 캐릭터간 밀도 높은 갈등구조가 3시간에 달하는 4막의 긴 시간을 여백 없이 동여맨다.
올리가(우미화)와 마샤(김지원), 그리고 일리나(장지아)는 "언젠가 모스크바로 돌아간다"는 꿈을 안고 살아가지만, 희망은 일상을 버티다 보낸 시간 속에 박제된다. 베르쉬닌(이우진)과 뚜젠바흐(문병주)가 "200년, 300년 후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들뜨지만, 도시가 불타는 재난 앞에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이런 고통을 더 겪어내야 하느냐"고 고개를 떨구는 대목에선 삶의 덧없음에 덩달아 주억거리게 된다.
체호프를 비관적인 작가로 해석하기보다 낙관적이며 희망을 예견하는 말들을 극 속에 녹여낸 문호로 바라보는 게 옳다고 하지만 코미디의 양념이 지나쳤다는 느낌은 지우기 어렵다. 애인인 뚜젠바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곧바로 희망찬 내일을 떠올리는 일리나의 모습은 혁명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내하겠다는 190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자의 잔상처럼 보여 거슬림이 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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