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그룹 사옥은 뜨거웠다. 시 낭송부터 시작해서 사물놀이, 승무, 인형극, 재즈, 팬터마임, 발레, 실내악 등 장르를 불문한 문화ㆍ예술 공연이 지하 소극장 '공간 사랑'에서 매일 밤 펼쳐졌다. 공연자들의 몸짓과 소리에 홀린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고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정원 120명인 소극장은 미어 터지기 일쑤였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고자 한 건축가 김수근의 뜻에 따라 온갖 분야의 예술이 섞이고 어우러지며 열기를 뿜어내던 그 곳은 지금 텅 비어 있다. 1990년대 초반 즈음 공연장 기능을 거의 잃었다.
21일 공매를 앞둔 공간 사옥은 한국 현대건축 최고의 걸작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더하지만 '공간'에 빚진 것은 건축계만이 아니다. 18일 국내 문화•예술계 인사 100여명이 공간 사옥 보존을 위해 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문화ㆍ예술계 원로가 된 이들은 한때 공간사랑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담배 피우던 청년들이었다.
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
77년 개관한 공간사랑은 건축그룹 공간이 사옥을 건축하면서 만든 소극장이다. 공간은 72년부터 건축 잡지 독자들을 위해 음악 공연과 전시회를 해왔는데 그걸 본격적으로 하려고 공간 사랑을 만든 것이다. 설계를 내가 맡았는데 김수근 선생이 "규모가 작으니까 다변적 무대를 만들어야겠다" 하시길래 상자를 그렸다. 가로, 세로 45㎝ 크기의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그것이 객석도 되고 강단도 되는 식이었다. 당시 건축사무소 일이 워낙 많아 거의 사무실에서 먹고 자다시피 했는데 가끔 지하로 내려가 공연을 보면 장르가 그야말로 전방위였다. 재즈 공연을 했다가 병신춤이 나오고, 신수정씨가 피아노를 치는가 하는가 하면 백남준 선생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돌이켜보면 한국 문화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이라는 것은 굉장한 힘을 가진 기억 장치인데, 이런 곳이 훼손된다면 우리 근현대 문화의 일부를 허무는 격이다. 이제 우리도 개발 논리를 제쳐두고 이런 것 하나쯤은 보존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 않나. 이것마저도 못한다면 너무 야만스러운 것이다.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사물놀이 명인
공간사랑은 알다시피 사물놀이가 탄생한 곳이다. 당연히 처음 연주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78년 2월 28일, 내가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지금에야 사물놀이가 자랑스러운 우리 가락으로 대우 받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이라 평론가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전통적인 사물 악기 연주를 저렇게 극장용 공연으로 변용해도 되냐는 거다. 한편에서는 매우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였다. 기성 세대가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나게 놀았다. 사물놀이뿐이 아니라 무속의 예술적 가치, 우리 춤과 우리 소리의 미학적 가치가 재조명되는 현장이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사물놀이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반면 공간 사옥은 공매를 앞두고 있으니 씁쓸하기 그지 없다. 공간 사옥은 건축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여문 알맹이가 더 중요하다. 공간이 만들어낸 사람들이 지금 한국 문화•예술계를 이끌고 있다. 공간 사옥이라는 건물 하나만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신과 열정에 대한 회고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상업적으로만 흐르는 요즘, 공간 사옥이 우리 사회에 경각심을 일으켰으면 한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 전 문화재청장
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공간사랑의 공연을 숱하게 봤다. 지금 무형문화재가 되고 유명 인사가 된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갔지만 지금도 기억 나는 건 70년대 말 부천에 사는 신간난 할머니의 공연이다. 정확치는 않지만 굿을 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이 난생 처음으로 무대에 선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으셨던 것 같다. 공연 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는데도 끝내 서울에 올라 오셨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데 앞으로 나가야 하는 동작에서 나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전부 그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알았다. 그 작은 공간이 공연자와 관객을 묶는 힘이 그렇게 엄청났다. 공간 사랑에선 문화•예술 강좌도 활발했다. 예술인들이 모여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당대의 음악, 미술, 사진에 대한 담론을 꽃피웠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은 김수근 선생이 사옥을 지을 당시 국민 소득이 500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문화 예술에 대한 아낌 없는 투자가 우리 문화 성장의 기폭제가 된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재청장 시절 가장 큰 고민은 100년 후 문화재로 지정할 건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공간 사옥을 못 지키면 100년 뒤에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할 건물이 몇 채나 남아 있겠는가.
공연기획자 강준혁,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 전 공간사랑 극장장
10년을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있으면서 모든 공연이 다 자식 같았다. 공간 사랑은 특히 전통 공연으로 유명했는데 1978년 공옥진 선생이 병신춤을 처음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첫 공연 후 반응이 좋아 '심청가'를 소리와 춤으로 바꿀 수 있겠냐고 했더니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 해 10월 나온 것이 '1인 창무극 심청가'다. 일주일 정도를 공연했는데 사람이 정말 많이 왔다. 120명 들어가면 꽉 차는 곳에 나중엔 260명 정도가 들어와서 돗자리 하나 펼 공간 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돗자리 위에서 공연을 했다. 그 해 말 결국 앙코르 공연을 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건축가 김원, 광장건축환경연구소 대표
공간 건축소에 입사한 것이 1965년이다. 낮에는 설계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하 소극장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공연을 봤는데 그때 본 바라춤과 승무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바라춤 공연에서 냄비 뚜껑 같은 것을 돌리는데 소리가 굉장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은 공연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한 번은 남정호라는 현대 무용가가 프랑스에서 유학 후 귀국 첫 무대를 공간 사랑에서 가졌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00여명 들어가는 지하실에서 첫 무대를 한다는 게 재미있지 않나. 지금 한예종 교수가 된 그는 몇 년 전 김수근 선생 20주기 기념식에서 김 선생 덕분에 한국 초연을 할 수 있었다며 무료로 공연을 해줬다. 공간사랑이 그런 곳이다. 거기서 뿌려진 씨앗이 한국 예술계 곳곳에서 열매를 거두고 있다. 한국 건축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공간 사옥이 그 정신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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