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는 얼마 전 국내 이공계 석학으로 꼽히는 한 타 대학 교수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삼성이 주관하는 미래기술육성사업 선정에 참여하는 심사위원이었다. 방문목적은 이 대학 정보전자신소재공학과 유영민 교수의 신청 프로젝트(희토류 금속을 포함하지 않는 고효율 엑시톤 포집분자)를 '현장실사'하기 위한 것. 그는 경희대 본부 연구처장 및 산학협력단 관계자들을 만나 유 교수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과 설비는 얼마나 갖췄는지, 연구에 참여할 학생규모와 수준은 얼마나 되는지 꼼꼼히 따졌다. 경희대 관계자는 "교수 연구과제 검증을 위한 현장 실사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주 끝난 삼성의 미래기술육성사업 과제 선정과정이 과학기술계에 화제를 낳고 있다. 민관을 넘어 지금까지 지원과제 선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파격의 연속이었다고 이 분야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다.
사실 지난 상반기 삼성이 미래과학기술과제 지원에 10년간 무려 1조5,000억원을 책정했다고 발표할 때부터 이공계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선정된 연구자에겐 4~5년에 걸쳐 평균 10억원 정도가 지원되는데, 삼성 측은 필요하다면 연구기간도, 연구비 한도도, 상용화 여부도 따지지 않겠다는 이른바 '3불문(不問)'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 이공계 대학교수는 "시간과 돈에 쫓기지 않고 당장 상용화 부담 없이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건 정부나 기업지원 프로젝트 관행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과제공모가 시작되고, 선정작업이 시작되자 '파격'의 강도는 더해갔다. 지원 조건이 뛰어나다 보니 엄청난 신청이 몰렸는데, 경쟁률이 대략 200대1이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는 9월부터 '2페이지 제안서 심사→블라인드 서면 심사→패널 토론식 발표심사'순으로 진행됐다.
우선 심사위원단 면면부터 달랐다. 기초과학분야를 주관했던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관계자는 "20여 명의 심사단을 꾸려 2박3일 합숙심사를 통해 1차 서면심사를 했다. 그리고 이 결과를 들고 노벨상 수상자 등 해외 전문가를 직접 찾아 또 한 번 검증을 맡겼다"고 전했다.
면접에는 해외석학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뇌신경을 모방한 차세대 컴퓨팅소자'연구로 선정된 서울대 전기전자공학부 이종호 교수는 "과제 발표 심사장에 들어갔더니 스위스연방공대(ETH) 교수 등 해외전문가가 3명이나 와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과제 발표 중간에도 거침없이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몰아붙였다. 말 그대로 아주 까다로운 토론식 심사였다"고 말했다.
이름과 이력을 적지 않고 2장짜리 아이디어 제안서만으로 진행한 '블라인드 테스트'도 눈길을 끌었다. '과거실적'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기술'을 고르는 것인 만큼, 명성이나 경력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독창성과 혁신성, 학문적 가치만 따지겠다는 것이었다.
한 참가 교수는 "다른 과제 선정에서는 보통 지원 액수가 1억 원을 넘으면 지원했다 실패하면 누가 책임 지느냐는 분위기 때문에 연구자 명성이나 이력을 감안해 뽑는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는 확실시 신선한 시도였다"고 전했다.
또 다른 참가 교수는 "언뜻 봐선 좋은 주제였더라도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아이디어 제안자가 과거 외부에 공개한 적 있거나 비슷한 기술이 세상에 존재하면 가차 없이 떨어뜨렸다"고 밝혔다.
기초과학 분야 과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김두철 고등과학원 교수는 "학맥, 인맥 등을 빼고 독창적이고 혁신적 아이디어를 찾자는 사업 취지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소수로 여겨지는 연구자나 신진 연구자의 과제가 뽑히는 파란이 일어났다. 1978년 생으로 최연소 연구책임자로 뽑힌 유영민 교수는 2007년에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데다, 외부연구 과제 진행 경험이 5번도 채 안 된다고 했다. 명성과 실적을 따지는 보통의 공모였다면, 통과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수리논리' 관련 주제로 뽑힌 연세대 수학과 김병한 교수는 "수리 논리는 대수학 위주의 국내 수학계에서 소수로 여겨진다"며 "그 동안 의기소침했던 소수 분야 연구자들도 희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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