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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11월 16일] 무대공포증-격랑을 헤쳐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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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11월 16일] 무대공포증-격랑을 헤쳐나갈 때

입력
2013.11.1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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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연주를 위해 출국을 단 이틀 앞두었던 때, 정신과에 자진해 찾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대공포증 때문이었지요. 누군가에게 이 불가항력의 공포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전이-역전이와 같은 따뜻한 정신분석을 예상했건만, 의사 선생님은 대뜸 뇌파부터 검사하자 이끄시더군요. 머리통에 십여개의 전극을 붙인 모양새가 영락없이 메두사와 같았습니다. 흐드러진 촉수를 떼어낸 후 본격적 상담을 기대했으나, 이번엔 난데없이 MBTI 성격검사지를 내놓으시는 겁니다. 숙제로 풀어오라는데 듣는둥 마는둥 의심쩍은 심정으로 받아 나왔습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그 의심은 타당했더군요. 뇌파검사는 간질 환자에게나 유용하더랍니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그도 아니면 심장약 처방이라도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낯선 무대를 향한 공포는 그렇게 가실 줄 모른 채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무대공포증은 독일어로 'Lampen Fieber'라 일컫습니다. 조명기구(Lampen)에 자동 반응하는 열병(Fieber)이란 의미이지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가락과 다리에 파르르 경련이 일며, 정서적으로 무장해제 돼버리기 일쑤입니다. 온몸의 근육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수의근으로 야속히 변신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에서는 무대공포증의 양상을 '각성'의 개념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면 각성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이때 창문을 닦는 것과 같은 단순 노동은 집중력을 높이는 사회적 촉진이 일어나지만, 연주 같이 복잡한 노동에는 과도한 긴장을 유발하는 사회적 억제가 일어납니다. 사회적 억제는 실력 발휘를 심각히 가로막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심리학책이 내어놓는 단 하나의 마법은 무한반복에 의한 '과도학습'입니다. 연습, 또 연습으로 다져진 물리적 근육 외에도 경험, 또 경험으로 다져진 단단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난 달, 스위스 신문 '타게스 안차이거'는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순회연주를 소개하며 짖궂게도 그녀의 악몽같은 기억을 불러 내었습니다. 기사에 친절히 링크된 동영상은 4년 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와의 모차르트 협연 장면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도입부를 연주하는 동안, 피아니스트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아연실색을 감추지 못합니다. 리카르도 샤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케스트라가 첫 음을 그었을 때, 피르스는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양 펄쩍 튀어 올랐다는군요. 연주자가 착실히 준비했던 곡은 모차르트의 다장조 협주곡이었건만, 오케스트라는 '다'가 아닌 '라'단조 협주곡에 막 진입했던 탓이었지요. 이런 어이없는 혼선은 통상 리허설 과정에서 조정되기 마련입니다만, 콘서트헤보우는 오랜 관행대로 협연자와 오케스트라의 첫 만남마저 '런치 콘서트'로 공개해 버렸습니다. 카메라는 청중들로 가득 찬 객석을 배경으로 이 위기일발의 피아니스트를 생생히 중계합니다. 당황과 공포에 질린 피르스의 얼굴 근육을 대하자니 심장근육이 덩달아 쫄깃해지더군요.

오케스트라가 협연자의 등장 순간을 성큼성큼 옥죄여 오던 때, 지휘자가 피아니스트를 향해 외칩니다. "I'm sure, you'll do that!" 너라면 할수 있어, 어럽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너라면 할 수 있다니, 협연자 입장에선 복장 터지는 소리이지요. 차라리 연주를 멈추고 청중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자기 악보라도 건네 줄 것이지, 이 무슨 속 편한 낙관주의랍니까. 어느덧 피아니스트가 등장할 순간에 이르자, 피르스는 거센 파도에 맞선 연약한 뗏목의 모습으로 첫 프레이즈를 연주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아내는 라단조의 선율은 격랑의 심리상태와 무관히 영롱하고 아름답습니다. 지휘자는 그녀의 놀라운 기억력이 기적을 불러왔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단지 머릿속 악보를 무탈히 끄집어낸 기억력 덕분이었을까요? 사회적 억제를 뛰어넘은 그녀의 각성은 숱한 시행착오와 절망으로 다져진 몸과 마음의 단단한 근육 덕택이었을 것입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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