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는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70년대 초에 퇴계로(필동)로 이사 와 지금은 예전에 살던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그야말로 퇴계로 토박이(?)이다. 얼마 전 동료들과 시나리오회의를 마치고 충무로에 위치한 '진○○'라는, 불고기가 유명한 식당에 들렀다. 그 식당은 50년 전통의 식당이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많은 맛집과 현대식 음식점에 가려 예전만큼의 명성은 아닌듯했다. 하지만 동료들과 불고기를 나눠먹고 보쌈김치를 먹으면서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난 불고기라는 것을 초등학교 졸업식날 처음 맛보았다. 1970년대 후반 아버지는 졸업식날 나를 그 식당에 데려가셨다. 우리집은 2남2녀였지만 사정이 어려웠던 아버지는 다른 형제와 어머니는 집에 둔 채 장남인 나만 데리고 졸업축하 의미로 그 식당에 데려가신 거였다.
외식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이 대한극장 옆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번 먹는 게 전부인 나에게 너무나 많은 밑반찬이 나오는 그 식당은 일단 규모면에서도 나를 압도했었다. 서울촌놈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3살이 돼서야 한번도 맛본 적이 없는 '불고기'라는 것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이었다.
황금빛 불판에 올려진 소고기에 불판 밑 홈을 타고 끓고 있는 국물 맛은 "아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었나?"라고 할 만큼 충격이었다. 그날의 충격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세상 어떤 음식을 먹어봐도 그날의 불고기만큼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은 없었다.
고기라야 가끔 소고기무우국이나 생일날 미역국에 있는걸 먹어본 게 전부였던 나에게 불판에 지글지글 익어대는 불고기는 신선한, 아니 완전 문화적인 충격이었고 게다가 불고기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그 맛은 집에 있는 형제들과 어머니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아버지는 걸신 들린 양 먹어대는 나를 보시면서 절대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난 아무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는 모든 가족을 다 데려올 수 없는 현실에 당신은 제대로 음식을 드시지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걸 생각할 여유도 그리고 너무나 불고기가 맛나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장시간의 시나리오회의를 마치고 동료들에게 퇴계로 토박이로서 그 식당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30대의 동료들은 정말 다들 맛나게 먹었다. 맥주를 권하고 보쌈김치를 나누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한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일순배 술이 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30년전 아버지와 처음 와 본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왜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랐는지 난 모르겠다. 아마 내 마음속에 처음 먹었던 불고기의 환상적인 맛만큼이나 당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같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지금 와 생각하니 아버지의 입장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어려운 시기에 4남매를 둔 40대 가장이 온 가족에게 배불리 불고기를 먹일 수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가 이젠 내가 아버지 나이가 돼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13살의 장남에게 맛난걸 먹이면서 다른 세 명의 자녀와 사랑하는 아내가 왜 떠오르지 않았겠는가…. 집에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하시면서 당신은 얼마나 힘드셨을까가 말이다.
이제 내가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꿈을 공유하는 동료들에게 불고기를 사주면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불고기가 최상의 음식은 아니지만 그리고 최고의 음식도 아니지만 내가 가족과, 동료와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불고기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똑 흘러내렸다. 그걸 본 동료가 "대표님 왜 우세요?"라고 하길래 "야 임마 밥값을 내가 내야 하잖아 그래서 운다. 앞으로 니들이 나한테 불고기 좀 사봐"하고 눈물을 감췄다. 나와 같이 작업하는 사랑하는 내 동료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불고기를 사 줄 수 있는 상황이 되길 바란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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