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유럽순방을 앞두고 가진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하여 "남북관계 발전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곧이어 김정은 제1위원장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진정으로 정상회담을 바란다면 올바른 예의부터 갖추라"고 비난했다.
정상회담은 아무리 해묵고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현안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화방식이다. 특히 북한은 지도자 중심의 유일체제를 운영하고 있어 남북정상이 만나 핵문제 등 여러 현안을 일시에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분쟁해결방법이다. 남한의 역대 지도자들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의 하나로 정상회담을 생각하거나 추진했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후 남북정상회담은 세 차례 추진됐다. 첫 합의는 1994년 7월 개최하기로 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의 정상회담 합의다. 하지만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6·15 공동선언과 10·4선언에 합의했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는 당시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공격을 검토할 정도의 위기 속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합의한 정상회담이었다. 당시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북ㆍ미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통과의례로, 워싱턴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여야 간 정권교체에 따른 진보정권 출범,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 대통령의 리더십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김일성 사후 북한주민 100만 이상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시기를 경험한 북한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의 외환위기를 겪은 남한이 소모적인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함으로써 남북관계설정이 늦어져 임기 말에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정권교체로 10·4선언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남과 북이 노무현 정부 임기 말에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6·15선언에 입각한 남북화해협력의 기조를 유지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회담 없이 정권이 교체될 경우 6ㆍ15선언이 사문화 될 수 있다는 북한의 위기인식이 작용하여 10ㆍ4선언이란 징검다리를 놓고 다음 정부와 관계 설정을 모색했던 것이다. 6·15와 10·4선언보다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도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했지만 회담성사와 관련한 조건 문제를 둘러싼 갈등,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핵실험 등으로 무산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본 적이 있다. 아마도 김정일 위원장이 생존해있다면 과거의 면담 경험을 바탕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하기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남북관계에 난제들이 많아 정상회담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전임 이명박 정부가 물려준 최악의 남북관계를 복원하지 못하고 집권 1년차를 보내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산적한 숙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당면한 숙제는 '핵을 가진 자와 어떻게 악수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핵해결의 가닥이 잡혀야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는 국내적 지지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정상회담 성사과정을 보면 북한이 위기인식을 가지고 정상회담을 통한 국면돌파 의지가 있어야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다. 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상호신뢰와 함께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라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경제와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고집하고, 우리 정부가 킬 체인 구축과 맞춤형 억제전략을 구체화하는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감안해 본다면 가까운 장래에 남북정상회담 성사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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