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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1월 14일] '시대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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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1월 14일] '시대의 끝'에서

입력
2013.11.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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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변화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주황색으로 물든 북한산을 지척으로 바라보며 연일 감탄사를 내뱉곤 한다. 음식물쓰레기라도 땅에 묻으러 나갔다 들어올라치면 마당 초입에 선 단풍나무가 어찌 나를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는 듯 늦가을 햇빛 아래 눈부시게 붉은 빛을 발산하며 알은 체를 한다. "그래, 너 참 예쁘구나" 하며 멈춰서지 않을 수 없다. 봄에 심은 어린 벚나무들도 붉은색, 노란색, 녹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작은 잎들을 떨구며 의젓하게 찬바람을 견디고 있고, 천일화는 낙엽이 굴러다니는 마당 구석구석을 지금도 노랗게 밝히고 있다. 쓰레기봉투를 손에 든 채 서서 햇빛이 내려앉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화려한 쇠락의 풍경을 한동안 바라본다. 그러다가 마지막 남은 수세미 몇 개와 아껴두었던 끝물 호박 한 개를 따서 바구니에 담으며, 이게 웬 호사인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살아 있고 싶다는 갈망이 내 속에서 간절히 일어난다. 나와 나의 가족과 내가 속한 세계의 삶이 지니는 부서지기 쉬운 성격, 그 나약함과 거룩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들지 않고 더욱 강렬해지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파괴되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나 역사와 인간의 잔혹함과 대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자신의 저서 에서 동서양의 인류가 고양된 종교적 의식에 도달했던 '축의 시대'의 공통된 시대적 특징을 끔찍한 폭력의 상황이었다고 썼다.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던 엄청난 폭력에 직면해서 역설적으로 동서양의 전사들은 공감의 감수성을 형성했고, 그것이 축의 시대의 영성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피에 젖은 적군 병사의 공포에 질린 눈을 마주보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 깊숙이 칼을 꽂으면서, 고통으로 떨리는 칼끝의 느낌을 손에 느끼면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도 내 손에 죽어가는 저 병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나도 그처럼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축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 살인자들은 죽어가는 자들과 살을 맞대지 않아도 된다. 무인폭격기가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 화면을 보고 적을 조준하여 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으로 인해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는 어두운 운명 아래 있다. 지금 바르샤바에서 개최되고 있는 UN기후변화회의에 필리핀 대표로 참가한 나드렙 사뇨는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구체적인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무기한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수퍼태풍 하이옌이 덮친 타클로반 출신으로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과 친척들, 며칠째 굶고 있는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며 음식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리핀으로 가보라고 말했다.

어느 면에서 문명의 진보란 인간이 폭력과 살해행위에 무감각해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래도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고 말들 한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옛날보다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진리이려면 먼 훗날 그의 아이도,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얼굴을 모르는 그의 이웃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일뿐, 진리가 아니다.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사는 것이고,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고대의 전사들이 제 손에 피를 묻혀가며 비로소 깨달았듯이 이제 우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폭력과 희생을 거치면서 깨달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 희생자가 되고 말 것인가.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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