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거의 사어가 된 적산(敵産)이라는 단어가 오늘도 마을 전체를 규정하는 곳이 있다. 가덕도 외양포. 행정동 명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이다. 하지만 부산 사는 사람이라도 낚시꾼이나 가봤을 곳이 가덕도이고, 가덕도에서도 진입도로가 뚫린 지 10년이 안 된 외진 어촌이 외양포라서, 이곳 얘기를 할 땐 적산이라는 단어도 그다지 외딴 느낌이 없다. 적이 남기고 간 마을, 그 스산한 풍경 속을 다녀왔다.
"내가 스무 살 묵을 때 여 들어와 이적지(여태껏) 이래 안 사나. 8ㆍ15해방 나던 해 손들고(만세 부르고) 들어왔으니께 ?V 년 됐노? 우째 살기는. 왜놈들이 놔놓고 간 집에 들어와가 아들 놓고 딸 놓고 살았제. 고기 잡아 묵으맨시롱. 고상(고생)고상 말도 몬 한다."
외양포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어느 집 처마 밑에 섰는데, 집주인 강연선(87)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오라더니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할머니가 겪은 세월이 갯내만큼이나 짰다. 봄이면 숭어 잡고 겨울이면 대구 건져 올리는 한적한 포구에 그토록 아린 사연들이 깃든 까닭을 짚어 보자면, 시간을 100년 하고도 조금 더 거꾸로 감아야 한다.
지금 대항에 속해 있지만 본래 외양포는 대항보다 큰 어촌이었다. 양천 허씨의 집성촌. 그런데 1904년,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발트함대와 맞설 진지가 필요했다. 주민들은 선산을 버리고 떠나길 거부했다. 그러나 집에 불을 지르고 총칼을 들이대는 일본군을 당할 방법이 없었다. 이듬해 외양포는 일본군 제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됐다.
대항 선착장에서 고갯길 넘어 외양포로 들어서는 초입에 아직 일본군 진지의 흔적이 뚜렷하다. 가까이서도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면 모를 만큼 은폐가 철저한 요새다. '司令部發祥之地(사령부발상지지)'라고 새긴 건립비를 돌아 안쪽으로 들어서면 포 2문씩을 숨길 수 있는 발사대 3곳, 탄약고 2곳, 군인들의 막사 자리 2곳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한 것도 아닌데 이토록 보존이 잘 된 것은, 진지가 격전을 대비한 군사시설로 건설된 덕이다.
시멘트와 몽돌을 섞어 두꺼운 골조를 세우고 그 위에 3~4m 높이로 토성을 쌓았다.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고 이제 돌계단만 남은 사열대에 올라야 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대나무와 억새로 덮여 있는 모습이 대낮에도 음산한 기운을 풍긴다. 누구도 철거하자거나, 또는 보존하자거나 말을 꺼낸 적도 없이, 일본군 진지가 100년도 넘게 음울한 표정으로 여기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해방 직후 미군이 포를 꺼내 갔다는 빈 발사대는 현재 건초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좋기는? 한번 살아보라매. 불하를 해주야 될 낀데 안 해주니까 이라고 안 사나. 여 땅들이 이적지 다 진해 통제부(해군사령부) 땅인 기라. 그라이까네 집도 몬 고치고 살도록 하제. 비 새니까 겨우 지붕 새로 하는 것만 뭐라 안 카고."
외양포에서 일본군 진지보다 인상적인 것은 적산가옥이다. 이제 전국 어딜 가봐도 적산가옥 찾기가 쉽지 않은데 외양포는 통째로 적산가옥의 마을이다. 집과 집 사이를 걷는 기분이 먼 기억의 저쪽을 걷듯, 무척이나 색달랐다. 그렇다는 얘기를 자발없이 꺼냈다가, 마을에 사시는 박수출(72)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이 마을의 적산가옥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은 마을에 사유지가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68년째 주민들은 제 마을에서 곁방살이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 군정기를 거친 뒤 외양포를 접수한 건 해군이었다. 해군은 일본군이 막사로 쓰던 집들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내줬다. 박 할아버지도 그렇게 네 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이 마을로 왔다. 부모님의 고향은 본래 가덕도 천성인데 1942년 만주 땅에 살러 갔다가 3년 만에 덜컥 해방돼 돌아왔다. 살던 집은 이미 딴 사람이 차지해 버렸고, 어쩔 수 없이 외양포로 흘러들어왔단다. 지금으로 치자면 동호수 추첨 같은 걸 그때 했다는데, 뽑기를 잘한 집은 장교가 살던 가옥을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집은 병사들이 쓰던 막사를 나눠 써야 했다.
70, 80년대 흔하던 슬레이트 지붕을 씌워 놨지만 집들은 분명 일본식 가옥이다. 겹겹이 나무를 겹쳐 벽을 바른 양식이나 일본식 함석 기와, 사각형 격자무늬로 만든 창문을 20여 채의 집집이 모두 볼 수 있었다. 해군은 꽤 엄격히 이 마을을 관리했는지 본 틀을 뜯어내고 새로 지은 집은 한 채도 없다. 주민들에게 죄송한 얘기일 수 있으나, 집들의 모습을 이대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아픈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여행의 마을로 개발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 두리번거리쌓고 고구매나 하나 묵고 가기라. 여 고구매가 맛이 괜찬니라."
솔직히, 시골 마을치고 주민들이 까칠한 편이다. 이해가 된다. 마을 내력도 내력이거니와, 가뜩이나 낡은 집을 낯선 사람이 구경거리 대하듯 기웃거리는 게 편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최근 낚시꾼이 많아지면서 외지인들에 대한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고, 박 할아버지는 얘기했다. 가덕도엔 일찌감치 연륙교가 생겼지만 외양포엔 아직 버스가 닿지 않는다. 자동차가 없다면 하루 네 차례 있는 연락선을 타야 가볼 수 있다. 그 깊숙한 곳에 두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마을이 숨어 있었다.
■ 가는 길
거가대교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편해졌다. 천성IC에서 나와 대항 방향으로 가면 된다. 대항에서 외양포로 넘어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편이다. 부산역에서 520번 버스를 타면 천성마을까지 갈 수 있다. 천성에서 외양포까지 하루 4차례(천성발 오전 7시 30분, 9시 30분, 오후 1시, 4시) 연락선이 다닌다.
부산=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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