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 작품 활동한 지 2년 된 신예"작년 젊은작가상 대상 받을 땐 압박 커 올해는 소설 쓰기 그만둘까 고민도"암시의 미학… 비밀스런 결말의 묘미"이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닐까 그런 의심 자체가 내 소설의 매력내년 여름 이후엔 장편소설 쓸 것"
수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의 반응은 다소 심드렁했다. 앞서 본심에 올랐음을 알린 바 있고, 본심 무렵 연락해 "왜 전화를 건 것 같냐"고 힌트까지 줬음에도 답변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모호했다. "글쎄요." 나중에 듣자 하니 '수상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까 봐 다른 작가들에게도 알려주려나 보다' 짐작했다고. 어릴 적부터 우러르던 선배 작가들과 나란히 본심에 오른 것만으로도 기쁨이 너끈했다고 하니 거기까지가 올해 누릴 수 있는 행운의 마지막 장이겠거니 여겼던 것 같다. 다음 날 강의할 소설창작론 수업 준비 중이던 그가 바로 행운의 수상자임을 알았을 때, 폭죽처럼 화사하고 경쾌하게 터져 나오던 연발의 환호성. 기쁨에도 감염력이 있다면 그의 바이러스는 최강의 등급으로 분류돼야 마땅하다.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손보미(33)씨는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된 신예 소설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문학적 저력은 '사건'이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9년 동 대학원에서 현대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그 해 계간 으로 등단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가 자신의 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계속 소설을 써도 좋을지 그만둬야 할지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보자 한 게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손보미라는 이름은 하나의 스캔들처럼 문학계 곳곳에 재빠르게 퍼져 나갔다.
"2009년부터 작품활동을 하긴 했지만 2011년에야 비로소 제 안에 작가라는 자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 1월 1일자 신문에 당선작이 나가고 사나흘 후에 바로 출판사에서 작품집을 계약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그 후로도 여러 출판사, 계간지 편집주간, 비평가들로부터 작품을 더 보고 싶다, 싣고 싶다, 그런 전화가 많이 왔죠. 너무 어리둥절했어요. 재미있기도 했고."
그 해 등단작을 포함해 무려 6편의 작품을 발표한 괴력은 이듬해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이라는 파란으로 이어졌다. 2012년 봄, 출판사 문학동네가 제정한 이 상의 제3회 수상자가 손보미임이 알려졌을 때, 손보미는 더 이상 한때의 붐으로 간과될 수 없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괄목할 만한 성취를 쏟아내는 요주의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을 받는 게 전혀 기쁘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런 기분?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게 뭔지 알겠는데, 그걸 과연 내가 채워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어떡하지'이 생각뿐이더라구요. 그런데 한국일보문학상은 너무 기뻐요."(웃음) 기대가 더 커질텐데, 라고 제동을 걸어도 막무가내였다. "몰라요. 몰라요. 지금은 이 기쁨을 만끽할래요. 이틀 후면 또다시 캄캄한 암흑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짧은 경력이지만, 올 한해는 소설가 손보미의 이력에서 가장 어둡고 힘겨운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첫 소설집 (문학동네 발행)이 올여름 출간돼 석 달 만에 3쇄를 찍으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만, 스스로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볼까 암중모색을 꾀해볼 만큼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기분이었다.
"다른 작가들은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저만 압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소설의 장점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정반대의 소설도 저는 써보고 싶거든요. 이를테면 신파적이거나 파토스가 넘치는 소설들이요. 그런데 들리는 말이 있으니 자꾸 저 자신을 억누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게 뭐지, 난 지금 제대로 쓰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더라구요. 올 한 해가 가장 많이 울었던 해인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잘하고 있고, 지금 쓰는 것처럼 써도 되겠구나 안심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수상까지 하게 되다니, 너무 큰 격려가 돼요."
손씨의 소설은 치밀한 구성과 정보의 의도적 누락으로 인한 암시와 여백의 미학이 그 특징이다. 작품 속에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소설은 얼핏 밋밋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대의 문학적 지형 속에서 꼼꼼한 독해로 읽어내면 '영리한 기미의 포착자' '알기에 입을 다무는 세련된 침묵' '삶의 파열을 드러내는 단편의 전형' '비밀스러운 결말의 묘미'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특히 비밀스러운 결말의 묘미는 그의 소설이 두고두고 여운을 남기는 핵심적 원인이다. 서로 의심하는 부부, 연인, 가족의 심리가 꽉 짜인 이야기 속에서 핍진하게 살아남에도 불구하고 그 퓰??원인과 결말을 우리는 좀처럼 확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독자들과 만날 때면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이 진위의 확인이다.
"저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저도 뭐가 사실인지 몰라요. 이 얘기가 거짓말일까 아닐까, 그런 의심 자체가 제 소설의 매력이랄까요. 추리소설 읽을 때처럼 그것 자체도 하나의 소설적 재미라고 생각해요."
주로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그는 "철석같이 사람을 믿는 성격"이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도 많지만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잘 믿는다"고. 의심과 불안이라는 주제를 자꾸 쓰게 되는 건 아마도 소설 쓰기에 대한 재능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작가의 고뇌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내년 하반기부터 작품 일정이 비어 있다. 장편 구상 때문이다. "그동안 고민할 틈도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많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내년 여름 이후에는 장편에 들어갈 계획이에요. 저한테 소설적 구성이나 기교가 뛰어나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사실 제가 좋아하는 소설은 정통적인 이야기들이거든요. 앞으로는 소설적 기술이나 기교 없이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걸 한번 써보고 싶어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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