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전 9시 54분 해운대역 플랫폼. 07시 동대구발 부전행 무궁화호 1771열차에서 내린 마지막 승객은 허리가 고붓한 할머니였다. 반대편 열차를 기다리던 아줌마와 몇 마디 나누더니 손수레에 싣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말린 시래기와 취나물, 실도라지, 토란대 따위가 거기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나물 몇 줌을 건네고, 천원짜리 몇 장을 받아 허리춤에 구겨 넣었다. "아따, 아지매. 여서 팔믄 안 된다카이요. 가서 하이소." "알았다, 마. 인자 메칠 남도 않았구만." 울산 서생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해운대 좌판에 나온다는 할머니와 역무원은 구면인 듯했다. 역무원의 말투는 역내 상거래를 규제하는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짓궂은 조카가 만만한 막내 고모에게 시비를 걸듯 뭉글뭉글했다. 열차가 떠나고 역은 곧 쓸쓸해졌는데, 며칠 남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말이 플랫폼에 고여 있었다.
휴전선 이남의 땅덩이는 삼면이 바다라지만 해변을 달리는 철도 노선은 민망할 만치 짧다. 해방 후 교통과 토건의 기준이 기차보다 자동차였던 까닭이다. 해안 드라이브 코스는 많아도 바닷가 기찻길은 거의 없다.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정서이겠지만, 우린 아마도 얻은 편리 이상의 낭만을 대가로 지불했을 것이다. 그 값을 확인해 보고 싶다면 부산 해운대구 중동 미포 바닷가에 가보면 된다. 누긋한 언덕이 몇 번 출렁인 다음 바다로 잠겨드는 길, 그 인상적인 풍경은 철도건널목의 따그랑거리는 차단기 소리가 있어야 완성된다.
그 소리는 청량하지만 묵직한 추와 같다.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바뀌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는 무국적의 신도시 해운대, 그 도시가 어디 날아가 버리지 않고 여전히 부산 땅에 붙어 있는 것은 그런 추라도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을지는 미포에 가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그 소리를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달 1일 해운대에서 달맞이고개 아랫도리를 돌아 청사포, 구덕포 거쳐 송정으로 가던 옛 동해남부선 구간이 폐선이 된다. 그리고 2일부터 열차는 새로 닦은 복선 철도 위로 운행한다. 부산이란 대도시에서 교행(交行)을 위해 기다리고 서 있는 열차의 모습은 적잖이 어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 그대로 도시의 빈티지한 분위기로 남겨뒀으면 하는 것이 여행자의 마음이지만, 열차를 생활의 수단으로 삼아 온 시민들에게 복선화는 오랜 숙원일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복선화 공사를 시작하고 꼬박 20년이 걸렸다. 이제 한반도 남동쪽의 고운 철길은 퇴역을 앞두고 있다.
동해남부선은 여든 살이 됐다. 1934년 일제가 수탈을 위해 놓은 철로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을 실어 날랐고, 산업화 시기 서울로 떠나는 사람들을 태워 보냈고, 임해공업지역의 수출물자를 부산항으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노선이 간선 교통축에서 한참 벗어나 버린 뒤로는, 부산과 포항 사이를 장보러 다니는 사람들이나, 간간이 옛 정취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철길이 됐다. 복선철도가 개통한 뒤로도 똑같이 동해남부선 열차는 운행된다. 하지만 고가도로와 터널로 연결된 직선 위로 달릴 이 철도를 그 동해남부선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폐선 되는 구간에서 가장 아릿한 장소는 청사포다. 해운대에서 출발한 열차를 탔다면, 미포에서 언뜻 보이기 시작하던 바다가 파노라마로, 무구한 윤슬로 북받쳐 오는 곳. 이곳엔 역이 따로 없다. 기차를 타고 갈라치면, 2~3분도 안 돼 창밖으로 흘러가 버리는 풍경이다. 1980, 90년대 해운대나 송정 해수욕장으로 MT를 온 젊은이들이, 얼근하게 소주 기운에 취해서 정처 없이 철길을 걷다 보면 닿던 곳이다. 파도에 멍이 들 만큼 작은 포구다. 하지만 여기 아직 바다에 제사 지내는 마을이 있고, 물질하는 해녀가 있고, "사랑한다고 나만 사랑한다고 철없던 그 맹세를, 내 진정 믿었던가 목메어 울고 가는 기적소리여"라고 절규한 최백호의 노래 '청사포'가 있다.
"글쎄요, 요즘은 통 안 보이네요.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가…"
솔직해 말해야겠다. 많이, 그리고 급하게 변해 있었다. 두어 해 전까지 이곳은 그냥 바닷가 한적한 포구였고 횟집 이 층에 딱 하나 들어선 프랜차이즈 커피집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새 카페 해변으로 변해 있었다. 주물로 만든 커피 로스터가 만만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중해풍 장식의 창가에 앉아 해녀 할머니들이 왜 안 보이느냐고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서울 말씨였다. 커피는 훌륭했지만 오래 앉아있지 않았다. 마을을 걸었다. 300살 된 망부송(望夫松)은 그대로였다. 옛날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됐다는 골매기 할매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그 앞에 전엔 못 봤던 근사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송정을 지나, 동해남부선은 기장, 좌천, 월내, 남창 등을 거쳐 울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간다. 동해남부선의 총 길이는 145.8㎞. 12월에 단선 철도가 폐선되고 복선화 구간으로 열차가 다니게 되는 구간은 그 가운데 11㎞ 정도다. 복선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옛 철로와 역사(驛舍)는 그래서, 단계적으로 기억 너머로 사라져갈 것이다. 해운대역과 송정역은 보존키로 결정됐지만 외지인에게 이름이 낯선 역들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송정과 바로 이어지는 좌천역과 월내역, 그리고 역사도 없는 간이역인 서생역이 먼저 포클레인의 삽날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같이 고와서 처연한 역이다.
월내역에서 해운대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무궁화호 1775열차, 요금은 2,200원 입석. 열차 안은 뜻밖에 북적였다. 승무원은 폐선이 결정된 뒤 부쩍 관광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외국인도 꽤 있었다. 영국에서 왔다는 아버지와 아들은 경주에 들렀다가 해운대로 간다고 했다. 남자친구의 팔짱을 낀 아가씨 앞엔 한복을 단정히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옆에 퍼질러 가는 대학생 무리는 서울의 어느 이름 있는 대학 점퍼를 입고 있었다. 술이 덜 깬 듯 피곤한 모습에 요즘도 이런 대학생들이 있나 싶은데 그 모습이 왠지 싫게 보이지 않았다. 고속의 세상을 비켜난 어떤 완행의 덜컹거림을, 그 학생들의 얼굴에서 내가 읽어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해운대 하차를 앞둔 방송이 나올 무렵 기차가 청사포를 지나쳤다. 시속 50㎞로 흐르는 바다, 이제 다음 달이면 못 보게 될 움직이는 바다가 네모난 창밖에 빛나고 있었다. 취해서 자고 있는 학생들을 깨웠다. "저것 좀 봐요." 부스스한 얼굴들이 주르르 창밖을 내다봤다. "……아!" 그리고 더 말이 없었다.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여행수첩]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는 상ㆍ하행 각 하루 18차례 운행한다. 대부분 부전-동대구 간 운행편이고, 부전-청량리 간 2차례, 부전-강릉 간 1차례의 운행편이 있다. 순천-포항 간 운행하는 열차도 상ㆍ하행 1차례(순천발 06시, 포항발 16시10분)씩 있다. www.korail.com ●코레일이 기차를 타고 가서 부산의 밤바다를 즐기는 'KTX-원나잇크루즈'를 매주 토요일 운행 중이다. KTX로 부산으로 이동한 뒤 팬스타크루즈호를 타고 동백섬, 광안리 등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왕복 KTX요금, 식사, 선상 숙박 등을 포함해 1인 22만5,300원부터. 1544-7788
부산=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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