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모든 오래된 도시의 숙제는 '기억하는 것'이다. 신도시에 밀려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이 곳에서 한때 중요하고 급박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 그래서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에 주요한 시사점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올해 초 광주시를 통과하는 광주천 변에 파빌리온이 하나 들어섰다. 거무스름한 나무로 지어 동양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이 구조물은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아자예와 미국 소설가 타이에 셀라시가 만든 인권 도서관이다. 인권 관련 도서 200권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은 광주 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정자이자,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상기하는 공간으로 기능할 예정이다.
광주천 인권 도서관은 10일 공개된 '광주폴리' 2차 사업의 결과물 8곳 중 하나다. 광주광역시와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추진 중인 도심 재생 및 도시 경관 사업인 광주폴리는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때 처음 시작해 올해 2회를 맞았다. 첫 회가 일제에 의해 말살된 광주 읍성의 흔적을 따라 도시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것이었다면 올해는 '인권과 공공공간'을 주제로 진행됐다. 세계적 건축가 렘 쿨하스가 만든 투표소를 비롯해 인권 도서관, 원탁 회의실 등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함의를 현대적 조형 감각으로 풀어낸 8개의 폴리가 도시 곳곳에 설치됐다.
이번 광주폴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도시 재생에 정치성이 가미됐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시 재생이 구도시의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 재활시키는 것이라면, 광주폴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라는 광주의 역사적 위상을 도시 재생에 전면적으로 개입시켰다.
렘 쿨하스와 소설가 잉고 니어만이 함께 만든 투표소는 직접민주주의의 부활을 연상케 하는 급진적 구조물이다. 광주 최대 번화가 충장로의 좁은 골목에 세워진 이 투표소는 행인들에게 가로등 형태의 배너를 통해 '성형 수술에 동의하십니까', '민주주의를 지지하십니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민들은 길 바닥에 쓰인 '찬성', '반대', '중립' 중 하나를 택해 지나가게 되고, 이들의 의견은 센서로 감지돼 집계된다.
경박한 광고 배너처럼 생긴 이 투표소가 역설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쿨하스는 폴리가 공개된 10일 영상 대담을 통해 "대중의 뜻을 반영하리라 믿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환상이 깨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위뿐"이라고 말했다. 광주 시민들은 투표소가 설치된 번화가를 걷는 것만으로도 시위에 참여하는 셈이다. 쿨하스와 니어만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광주, 그것도 정치에 관심을 잃은 젊은이들의 장소에 투표소를 설치함으로써 이제는 거의 잊혀진 민주적 가치인 '발언'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광주역 앞 교통섬에 세워진 '혁명의 교차로'는 교차로라는 장소가 가진 저항의 힘에 주목했다. 5ㆍ18 당시 시위자들이 처음 모여 들었던 회전 교차로가 최근 카이로, 튀니스, 테헤란 등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때도 저항의 장소가 됐다는 점에 착안한 프로젝트다. 영국 건축가 에얄 와이즈만과 이란 건축가 사메네 모아피가 만든 폴리는 내부에 원탁이 있고 벽이 양면거울로 이루어진 일종의 회의실이다. 원탁은 둘러 앉은 모든 이들의 발언권을 보장하고, 마주 보는 거울들은 거기에 비친 참석자들을 무한대로 증식시켜 5ㆍ18 당시의 뜨거움을 찰나적으로 재현한다.
광주폴리 2회 큐레이터를 맡은 천의영 경기대 교수는 "폴리는 정부와 시민의 각성을 유도하는 일종의 덫"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일괄적 도시 개발로 광주시의 풍경이 다른 도시와 똑같아지고 있는 가운데 광주의 고유한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 곳곳에 설치된 폴리는 공간이자 오브제로서 그 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담론을 부추기는 역할을 수행한다.
피로 덮인 사진과 딱딱한 표어로 기념관 속에 박제됐던 민주화 운동이 공공 시설물로 진화해 동시대적 생명을 얻었다는 것, 여기에 조형미를 도입해 도심 재생의 숙제를 해결했다는 것. 이제 2회를 맞은 광주폴리를 눈 여겨 봐야 할 이유다.
광주=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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