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읽은 수많은 기사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것은 2003년 30대 주부가 세 아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 사건이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떨어뜨리기 직전 이웃이 들었다는 "엄마 나 죽기 싫어"라는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몇 날 며칠 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들은 한 이웃이 아파트 복도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아무 일 아니다"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를 던진 뒤 셋째를 안고 투신했다. 어머니가 처한 생활고나 우울증을 이해하기 앞서 죄 없는 어린 자녀들까지 왜 죽음을 맞아야 했는지 화가 치밀었다.
최근에는 계모의 폭행으로 여덟 살짜리 아이가 무참하게 생명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가고 싶어했던 소녀는 계모에게 맞아 갈비뼈 16개가 부러진 상태였고, 이전에도 상습적인 폭행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엄마가 되어서인지, 이렇듯 어린 아이들이 가혹한 사건의 피해자가 된 기사는 읽는 것조차 싫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온갖 종류의 뉴스를 다루지만 아이들의 고통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아이가 느꼈을 고통도 끔찍하지만, 몇 년 머물지도 못한 이 세상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외롭고 무섭고 캄캄한 곳이었을까 상상해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보호자여야 할 부모가 가해자가 됐으니 아이는 온전히 혼자서 엄청난 폭력과 증오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부모에게 저항할 힘도 없었고,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어린 영혼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단 한 명만 있었어도 좋았으련만,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절망스러웠을까. 아니 나도 맞지 않고 사랑받으며 살아도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나 했을까.
예전처럼 대가족이 모여 살지 않고 지역공동체가 끈끈하지도 않은 현대 사회에서 개별화한 사적 공간인 현관문 내부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끔찍한 결과를 낳기 전까진 아무렇지 않은 듯 숨어 있기 십상이다. 학대가 장기간에 걸쳐 상습적으로 반복되면 어린 아이가 아닌 성인이라 해도 폭력을 숙명처럼 받아들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전형적이다.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는 흔히 나중에 가해자가 돼 또 다른 약자를 학대하곤 한다.
극소수의 문제라고, 그 집안이 별종이라고 치부하고 말아야 하나.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소풍을 못 가고 영원히 친구들 곁을 떠난 어린 소녀는 정말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았는지.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친구와 학교 선생님, 가끔 놀러가던 친구네 부모, 등하굣길 얼굴을 마주쳤을 이웃집 사람들, 자주 들르던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 아이를 진단하고 치료한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우리 사회의 모든 일원이 그와 함께 살았다. 어쩌면 우리 중 일부는 아이의 몸에 있는 멍자국, 어두운 표정을 보았을 수 있다. 창문 너머로 맞는 소리, 우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 골절과 화상 등 반복되는 사고에 고개를 갸우뚱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보고도 차마 나서지 못했거나 무심하게 넘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행동해야 할 때는 이 순간이다. 뭔가 의심쩍다 싶을 때 한번 더 돌아보고 한마디 더 물어보는 관심과 오지랖이 법보다 더 실효성 높은 감시망이 될 수 있다. 경찰이 모든 집 문을 열어보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많은 시민들이 비슷한 부모의 심정으로 계모를 엄벌에 처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내 옆에 있을 또 다른 피해자를 구하는 일이다. 자기방어력이 없는 약자에 대한 범죄만은 최소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김희원 사회부 부장대우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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