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저녁 인도네시아 발리섬 남부의 쿠타 해변.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신나게 뛰어 놀던 한 무리 한국 청소년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일행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가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것이다. 낯선 발리에 도착한지 이틀 째,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해는 져서 깜깜하고 개 짖는 소리만 사납게 들려왔다. 인터넷이 안 되니 손에 쥔 스마트폰 지도 앱도 무용지물. 순식간에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은 4명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지나오면서 본 건물 모양을 기억해냈고 누구는 몇 마디 익힌 현지어를 동원해 동네 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지도도 없이 흐릿한 가로등 불빛과 기억에 의지해 겨우 약속 장소를 찾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알고 보니 5분이면 될 거리였다. 아이들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나투어가 소외계층 청소년 지원사업으로 7~11일 진행한 '희망여행, 지구별 여행학교-바칼로레아'는 이처럼 크고 작은 소동으로 가득했다. 이 여행의 컨셉트는 객관식 또는 단답형이 아닌 논술형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프랑스 대학입학시험 '바칼로레아'에서 따왔다. 아이들 스스로 묻고 답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여행을 깊이 있게 체험하게 하자는 취지다. 올해 첫 여행의 주인공은 경기 부천시 사회복지관 '고리울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방과후를 보내는 중학교 3학년생 8명. 이들은 지난 5월부터 여행을 기획해왔다.
어려운 형편 탓에 여행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는 준비 자체가 좋은 공부였다. 선발 과정에서 왜 여행을 가고 싶은지 이유를 적어냈고, 최종 선발 후에는 자치회의를 만들어 여행지에 관해 공부했다. 인솔교사로 참여한 박은혜(28)씨는 "아이들이 6개월 넘게 인터넷과 책을 뒤적이며 철저하게 준비했다"면서 "사진 촬영, 현지 협상, 회의 진행 등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행 내내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이들은 우붓 쿠타 스미냑 짐바란 등 발리의 주요 관광지를 탐방하는 동안 숙소와 교통편을 제외한 모든 일을 직접 해결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쇼핑이나 식사, 현지 상황에 맞춰 일정을 조율하는 일 등이 모두 아이들의 몫이었다. 난생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웃지 못할 일도 끊이지 않았다. 택시를 탔다가 바가지 요금을 물고, 주문한 식사의 향이 너무 강해 입에도 대지 못하는 등 실수가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추억거리가 됐다.
이상진 하나투어 CSR팀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행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이 여행을 직접 준비하고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며 "여행을 통해 억은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새로운 열정적인 삶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행 마지막 날인 10일 아이들은 스스로 만들어간 여행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다솜(15ㆍ수주중3)양은 "새로운 문화를 접한 발리 여행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도전"이라고 했고, 길잡이 역할을 한 백승룡(15ㆍ수주중3)군은 "앞으로 어떤 문제에 맞닥뜨리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아이들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내 뜻대로 하루를 꾸며 본 여행기간, 자유를 찾고 싶었지만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닷새라는 짧은 시간, 아이들은 훌쩍 커 있었다.
발리=손효숙기자 sh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