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태의 '성묘'는 적군묘지를 소재로 한 13쪽 분량의 단편치고도 다소 짧은 소설이다. 세간에서 '적군묘지'라고 부르는 '북한군/중국군 묘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숨진 이들의 묘를 1996년 경기 파주 야산에 한데 모으고 이후 발굴 유해까지 차례차례 모아 조성한 묘역. 제재에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전성태는 분단이나 농촌문제, 다문화사회의 차별 등 이른바 민족문학, 리얼리즘의 본령을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펼쳐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군의 일원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30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주임상사까지 지낸 뒤 군 부대 앞에서 잡화를 팔고 군복 수선도 해주며 적군묘지를 돌보는 승리상회 주인이다. 그가 고향 어름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적지의 북향에 묻힌 이들 보살피기를 자처한 이유는 오랫동안 해먹어온 자신의 고추밭 옆에 이 묘지가 생겼다는 것이 전부다. 벌초라든지 묘역 전체 관리는 부대에서 하지만 그는 새로 무덤이 들어서면 이튿날이라도 소주 한 잔 올리고 명절이면 묘역 상석에 조촐하게 제수음식을 올려 원혼을 달랜다.
벌써 20년 가까이 그 일을 해오던 노인이 이제 고추밭을 팔고 이곳을 떠날 모양이다. 소설은 거의 대부분 '무명인'이라는 나무팻말 뒤 애기무덤 같은 적군 묘지에 올릴 마지막 시향(時享)을 준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야기 사이사이 고추밭에서 허리를 삐끗해 몸져누운 아내 심씨와의 작은 다툼, 부대원들에게서 부탁받은 물건을 사가려고 가게에 들른 후임병과의 대화 같은 일화를 같이 엮어냈다.
마치 화두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1992년 서해 반잠수정 침투사건 때 사살된 여섯 명의 무장 침투조 중 한 명인 김광식 대위 앞에 지지난해부터 놓인 국화꽃. 영웅의 유해를 수습하라고 공작원이라도 남파했나, 사건 당시 죽거나 붙잡히지 않은 공작원이 죄책감 때문에 찾아왔나, 혹시 탈북자 가운데 그의 가족이 있어서? 국화꽃의 주인공을 추측하던 끝에 노인은 '적군의 묘지에 제물을 올리는 생경하고 특이한 경험'을 자성할 기회를 얻게 된다. '군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왠지 감당이 안 되지만, 그러나 은밀하게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이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인간적인가? 그래서 나는 사람인가?'
노인은 마지막 성묘를 준비하느라 돼지머리와 떡을 맞추려고 읍내로 나가는 버스 안에서 못 보던 젊은 여자가 묘지 입구에서 타는 걸 본다. 혹시 김 대위 묘에 국화를 놓고 오는 여자일까? 내일 무덤 앞에서 국화를 발견한다면 그 꽃을 치울 것 같았다. 누구도 국화를 목격하지 못할 테고 그래서 누군가의 성묘길은 계속될 수 있을 테니까.
작품 길이나 소재 때문에 특유의 입담과 해학으로 '김유정과 채만식, 이문구의 문체'를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의 재능이 이 소설에서 그리 명징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렇더라도 아내 심씨와 노인의 까칠한 대화, 국화꽃의 정체를 두고 김 중사와 노인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 같은 대목에서 이미 여러 문학상 수상으로 공인받은 작가의 역량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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