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금 주자, 맏이 박혜리나15인조 가야금 합주단 대표로 활동박범훈 작곡 작품, 무대서 두 차례 협연"작곡가로서 아버지, 동서양 특징 아울러"● 해금·얼후 주자 박두리나두 악기 나란히 다뤄 선구자적 활약 기대박범훈, 딸 위해 얼후 산조·협주곡 작곡"대가인 아버지 앞에서 연습은 안해요"● 한국무용 박세리나시야 넓히라는 기대 부응 美유학 계획"아버지의 무용곡은 리듬감 강해 신명언니의 연주로 춤추면 참신할 무대 될 것"
"우리 집 가족들한테 고마움을 전한다. 작곡ㆍ지휘 한다고 혼자 떠돌아 다니다가 이제는 나이 들어 집안 식구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줄 알았더니 공부 철 다 지나서 박사 공부한다고 얼굴 보기 더욱 어렵게 된 나를 아무 불평 없이 따듯하게 대해 준 우리 식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무려 650쪽을 헤아리는 학술 저서 (2000년 장경각)의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소박한 구절은 그 필자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재단법인 '뭇소리'를 1년 반 동안 이끌고 있는 국악인 박범훈(65)은 사재 등을 모아 고향 경기 양평군 강상면에 조성한 뭇소리중앙예술원에 모인 세 딸 앞에서, 영락없는 딸 바보였다.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 중앙대 총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단장 등 문화 예술인으로서는 특별한 시간을 보내왔지만 이제는 낙향해 서울을 오가며 또 다른 생을 준비하고 있다.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그 곳을 기부와 기증의 토대로 만들 것이라는 계획도, 이제는 교수 등으로 활동중인 제자들을 위한 터전으로 키워나갈 것이라는 포부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로서의 소박한 일상만 할까. 손자까지 합해서 1주일에 한번은 모이는 가족 앞에서 그는 한 켠에 세워둔 색소폰을 들고 최신 유행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노신사가 된다.
그의 음악은 악가무(樂歌舞)가 공존하는 연희 양식으로서 국악의 총체성을 증명한다. 세 딸은 아버지의 신념에 대한 현실적 증거다. 가야금의 혜리나(33ㆍ중앙대예술대 전통예술학부 강사. 중앙가야스트라 대표), 해금과 얼후(二胡)의 두리나(31ㆍ용인대 문화예술대 국악과 교수), 한국 무용의 세리나(23ㆍ중앙대 예술대 공연영상창작학부 무용 전공) 등이 모인 날, 때마침 내린 가을비가 운치를 더했다.
각각 일정에 쫓기는 그들이 언론의 취재에 응해 한 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다. 셋이 함께 하는 연주회가 없었다기보다 아예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 자기 분야에서 거뜬히 한몫 하지만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는 여전히, 아무도 거기서 춤 추거나 연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공연장에 따라다니다 보니 중앙관현악단 사람들, 특히 언니들과 자연스레 가까워졌죠." 맏이 혜리나 씨는 당연히 태생적 이점을 가장 먼저 누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2현 산조 가야금으로 시작한 그는 법금, 18현금, 25현금 등 가야금은 전부 다 마스터했다.
2008년 한ㆍ중ㆍ일 연합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연주했던 아버지의 곡'아시아의 소리'에서 20분 동안 진양조에서 휘몰이까지 산조의 형식으로 풀어 보였던 무대는 아버지와 협연했다. 1995년 자신이 초연했던 곡이지만 원작자인 아버지와의 협연 기회는, 중앙국악관현악단 등과의 무대와 비긴다면 인색했던 편이다. 또 국립극장에서 아버지의 지휘, 중앙관현악단의 반주로 선보였던 '세 산조' 무대 등 두 차례가 전부다. '세 산조'는 뉴욕 유학 때 중앙예술단의 순회 공연 중 링컨센터 무대에서 국악오케트라의 반주로도 협연(지휘 김남윤)했다.
자신이 대학 3학년일 때 아버지가 지어준 '돈돌라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가야금을 갖고 놀라는 의미로 썼다'며 주셨죠." 초연 당시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일원으로서 그도 참여했던 이 곡은 가야금의 기교가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매우 엄한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막상 작업 때는 특유의 유머로 긴장감을 해소하시는 아버지가 금세 느껴지는 곡이죠. 서양곡 작곡의 경험 덕에 동서양의 특징을 아우르시니까요."
그는 지금 15인조의 가야금 합주단 '중앙가야스트라' 대표다. '돈돌라리''옹헤야' 등 가야금을 위한 창작곡을 비롯해, 민요ㆍ영화음악ㆍ팝 등을 편곡한 매들리 등 그들의 인기 레퍼토리는 인터넷 상에서 정기 연주회 '춤추는 가얏고' 실황을 통해 확인된다. 다음 정기 연주회는 내년 3월.
악기 개량이 앞선 북한의 작업과 비교한다면? "북한은 '21현 가야금을 위한 도라지' 등 우리보다 앞서 실험했다. 그것이 남한으로 건너 오면서 22줄을 거쳐 25줄로 정착된 것이다."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의 곡은 작품이 밝고도 경쾌해 남한의 국악과 현저한 차이가 있지만 남북의 가야금은 조율법 등이 똑 같아 합동 연주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지난해 8월'해방 전 유치원 유희 창가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
그는 대가인 아버지의 딸과 제자를 키우는 스승으로서의 존재적 괴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학생들 가르치는 게 곧 배우는 것이란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더 노력하죠.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으로요." 그러나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큰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 크면서 차차 아버지의 명성과 위상을 알게 됐다.
"학교에서는 가야금 소리가 싫을 만큼 스트레스가 컸어요. 뉴욕대 음악교육대학원에서 2년 공부하면서 많이 해소됐죠. 부담감은 여전히 크지만."국악교육 시스템 등 앞으로 큰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인 그의 말이다.
한편 두리나씨는 타 장르와의 협연으로 최근 주목 받고 있는 해금과, 그와 유사한 중국 악기 얼후 등 두 악기의 전문 주자다. 지난 4월 국립극장에서 펼쳐진 '박범훈의 소리 연(緣)' 무대에서는 박범훈 작곡의 얼후 협주곡 '향'이 그의 연주로 펼쳐졌다. 2012년 박씨가 작곡한 '얼후 산조' 이후, 딸을 위해 쓴 얼후 곡이었다. 해금에는 쓰지 않는 개방현 주법을 적극 구사, 얼후 특유의 유려한 맛이 물씬 풍겼다. 앞서 2009년의 무대에서는 해금 반, 얼후 반으로 구성해 최초로 두 악기가 나란히 등장하는 기록을 세운 두리나씨의 선구자적 활약이 기대를 모은다. 지난해 9월, 국내 최초의 얼후 교본'얼후'를 펴냈다(민속원 발행).
아버지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하다. "아버지는 연주의 테크닉적 부분은 전혀 언급 안 하세요.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연습 한 적은 없죠. 워낙 대가라 범접할 수 없다는 부담감은 분명 있어요."
그는 해금을 초등학교 6학년 때, 얼후는 우리의 음대 대학원격인 중국음악학원에 유학 가서 배웠다. "중국의 악기 개량 사업이 가장 성공을 거둔 케이스죠. 현은 쇠줄, 울림통은 뱀껍질이에요." '얼후 산조'와 무용곡'얼후 협주곡 향'등 아버지는 딸에게 작품으로 답했다. "함경도 민요에 바탕을 둔 가야금 3중주곡 '돈돌라리'는 듣기 좋지만 시김새와 테크닉은 매우 까다로워요." 작품 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청각 예술이 아니어서일까, 무용을 하는 막내 세리나씨는 보다 자유스러워 보인다. 지난2012년 4월 국립극장에서 부처님오신날 기념 봉축 음악회 '보현행원송'에서 그는 재학중인 중앙대의 담당 교수 채향순 중앙무용단 소속으로 부친의 불교 음악에 맞춰 승무, 나비춤, 법고춤 등을 췄다. 앞서 2002년 월드컵 개막제에서는 '제천무' 중 부친의 불교 음악에 기초한 '화현과 바라'에 참여했다. 이매방 류의 승무에 기초한 창작무였다. 부친이 작곡한 무용곡에 대한 딸의 평가다. "신명 나죠. 리듬감이 강해 사람을 움직이게 하거든요." 웅장해 더러는 전율감마저 든다는 것이다. 현재 유튜브 상의 국악방송 콘텐츠에'보현행원송'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관련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무용인으로서의 막내는 말했다. "일후 협주곡 '향'을 셋이 함께 한다면 참신한 창작 무용 무대가 될 거에요,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다음은 그의 태생적 강점일까? " 아버지의 음악에 무용이 맞추어 가겠지만 내게 맞춰 잘 해 주실 거에요." 그러나 그 같은 무대는, 10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내년 졸업 후 무용에 강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의 2년 박사 과정에 입학할 계획이에요." 한국 무용만 하지 말고 보다 시야를 넓히기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컸다.
그는 지난해 제 9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서 민족 정통 시니어 부문에서 우승했고, 2009년 고교 3학년 때는 한국무용협회 콩쿨 고등부 전통 부문에서 특별상을 탔다. 모두 이매방 류의 살풀이였다. 요즘 독일 모던 댄스의 거두인 라반의 무용 이론에 빠져 있는 그 역시 아버지의 적자다.
양평=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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