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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11일] 파시즘은 국민의 지지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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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11일] 파시즘은 국민의 지지로부터 온다

입력
2013.11.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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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한 것은 의외로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였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극심한 실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나치당에 힘을 실어준다. 공산당의 의석 확대와 혁명의 발발을 겁낸 중도파와 온건보수파가 결집한 결과였다. 32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된 나치당의 히틀러는 이듬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에 임명되고,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의회의 합법적인 법안 통과를 거쳐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 불리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린다.

'파시즘'이란 알다시피 자본과 정치권력과 군부ㆍ경찰력 등의 무력이 삼각동맹을 이룬 체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파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국민들의 지지다. 다수 국민들이 지지한다고 해서 파시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쿠데타나 반란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이라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혼은 8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공황으로 인해 몰락한 독일의 중산층들처럼 극우적 정파를 택한 사람들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인 불황에 시달려온 국민들이었다. 좌파들과 북한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보다는 경제적 안정이라는 보수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렇게 과반수 지지로 선출된 권력은 늘 50%를 넘는 안정된 지지율에 힘입어 마음껏 법을 휘두르는 중이다. 국가기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은 지난 일로 묻고 '선거 불복'을 운운하며 야당의 입을 막는다.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공상적 무장 폭동을 얘기했다는 이유로 현역 의원을 체포하고, 판결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이니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들어 공당의 해산을 청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정은 합법적인 것이다. 30년 만에 부활했다는 형법의 내란음모죄와 헌법의 정당해산 조항이 적용된다. 같은 방식으로 현행 노동법에 따라 전교조는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문제 삼아 불법화시키고, 전공노에 대해서는 공무원 개인의 선거 개입을 들어 탄압을 가한다. 그러는 사이 거대재벌 삼성은 노동자가 자신을 보호해줄 노조조차 없이 죽음을 맞아도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는다.

지금 통합진보당을 바이마르 말기에 탄압 받던 공산당과 견주고 현 정부와 새누리당을 나치와 동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파시즘은 폭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다수 국민의 지지와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을 유지 확대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또 다시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 밑에는 소시민들의 욕망(또는 불만)이 튼튼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계와 생활의 안정만 보장된다면 정치적 자유나 권리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이런 소시민과 중산층과 자본가들의 결탁이 나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현명하게도 현 정부는 얼마 전 국정원 선거개입 이슈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총리를 통해 민생을 들고 나왔다. 정쟁이 격화될 때마다 민생을 언급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요 이런 일상적인 제스처에서 파시즘의 역사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장된 상상 아닐까?

그렇지 않다.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에게 시대의 변화는 그리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자잘한 사건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중첩되는 가운데 한 시기가 지나면 그제야 시대가 달라진 것을 느끼는 법이다. 유신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그 시대를 개발독재나 파시즘으로 인식하지만 당시를 살던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박정희와 통일주체국민회의와 학교 교련과 제식훈련은 그저 일상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있었지만 그를 주목한 사람은 소수였다. 쉽게 생각하지 말자. 파시즘은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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