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9~11일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에 그린피스의 검은 현수막이 걸렸다. 현수막에는 방사능 기호를 얼굴 삼은 뭉크의 대표작 '절규'와 '25km'라는 숫자가 실렸다. 25km는 광안대교에서 경남 고리 원자력발전소까지의 거리. 원전 사고에 대비해 정부가 설정한 비상계획구역을 확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린피스 활동가 4명은 3일간 지상 100m 주탑에서 비박까지 감행했다. 이 3일간의 액션은 '아찔한 고공해프닝'쯤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42년 그린피스 활동 매뉴얼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된 신호탄이었다.
1단계 문제 제시
원자로 23기가 가동중인 한국은 원전 사고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을까? 그린피스 한국 사무소 활동가들은 이 물음으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본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반경 30~50km이내 주민 전원을 대피시켰다. 고리 원전 반경 30km내에는 한국 제2 도시 부산 일부를 포함 모두 34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인구밀집도 부분에서 세계 최고 수준. 반면 한국의 비상계획구역 8~10km는 미국 80km, 독일 25km, 스위스 20km에 못 미친다. 서형림(27)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는 "한국은 생각보다 원전 위험에 많이 노출돼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캠페인팀은 작년 4월 '후쿠시마의 교훈'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냈다.
2단계 슬로건 정하기
마리오 다마토 그린피스 동아시아 지부 대표는 "NGO의 보고서 대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책장에 꽂혀있게 된다"며 "그린피스는 비폭력 직접행동(Non-Violent Direct Action· NVDA)으로 보고서의 문제의식과 해법을 대중에게 전파한다"고 말했다.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슬로건을 뽑기 위해 전 스태프가 브레인스토밍 하고, 전담 팀이 꾸려진다. 보고서를 근거로 정치권이나 원전 관련자와 대화하는 캠페인팀, 실제로 NVDA를 수행해서 대중들과 만나는 액션팀, 커뮤니케이션팀. 관건은 공조. 이건 그린피스의 거의 모든 활동에 적용되는 공식이다. 슬로건은 '반(反)원전'이 아니라 '원전 사고시 비상계획구역을 반경 30km까지 확대하라'로 정해졌다.
3단계 비폭력 직접행동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릴 차례다. 그린피스는 포경에 반대해 고무보트를 타고 고래잡이 어선의 작살을 막아 섰던 1986년의 활동 이미지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장을 보면(Bearing Witness) 그 현장에 뛰어든다는 것, 대신 철저히 준비해서 창의적이고도 멋있게 뛰어든다(NVDA)는 것이 그린피스의 정신. 송준권(41) 선임 액션 캠페이너는 "창의적이어야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며 "고리원전에서 30km를 그어보면 부산역까지 가는데, 더 상징적인 곳을 찾다 보니 광안대교가 옆에 있었다. 다리에서 액션을 하는 쪽이 더 멋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안전성과 법률검토는 NVDA의 기본. 전문가가 필요하면 해외 사무소의 지원을 받는다. 광안대교에 올라간 4명은 송 캠페이너 외에 대만 인도네시아 미국인으로, 모두 암벽등반 전문교육을 이수한 이들이었다.
4단계 사회적 공론화
7월 9일, 이들은 광안대교 케이블을 따라 제2주탑에 올랐다. 캠페인팀은 다음 날인 10일 한국 원전 문제의 대안을 담은 보고서 '방사능 방재계획 2013'을 발간했다. 커뮤니케이션팀은 캠페인 홍보에 주력했다. 기자들을 미디어 보트에 태워 사진이 가장 잘 나올 만한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갔고, 지역 방송은 매 시간 시위 속보를 보도했다. 광안대교 액션 사진은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트위터를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1일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수력원자력, 부산시, 시의회는 그린피스와의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고공농성 52시간 만에 활동가들은 광안대교에서 내려와 경찰에 연행됐다.
활동가 4명은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송 캠페이너는 "법적 제재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대문에 우리에겐 법원도 준비된 캠페인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활동가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건조물 침입,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원전사고 안전대책 부족에 관한 정부나 시민들의 경각심 고취라는 전적으로 공익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뤄진 액션이라는 점을 참작 받았다. 가벼운 벌금형. 공무집행 방해에는 무혐의가 선고됐다.
에너지 문제와 관련한 한국 그린피스의 목표는 단기적으로는 신규 원전 추가 건설 반대, 장기적으로는 탈원전과 재생가능 에너지 전환이다. 국제그린피스는 세계 41번째 사실상 막내 그린피스의 멋진 데뷔작으로 광안대교 농성을 평가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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