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고교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사관(史觀) 논란이 슬슬 공회전 모드로 접어드는 조짐이다. 엔진소음은 요란하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잔뜩 핏대를 올려 서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번에도 결국 보람도 없이 갈팡질팡 헛발질만 하다 말 공산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정홍원 국무총리가 국회 예결위에서 밝힌 역사교과서 국정 전환 추진 얘기는 그런 우려를 더욱 짙게 한다. 정 총리는 "다양한 역사관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해서는 통일된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공론화해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당과 진보사학계 등은 즉각 "시대착오적 발상"이니, "독재로의 회귀"니 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요컨대 사관의 옳고 그름이라는 막연한 화두를 놓고 삿대질 했던 게 1회전이었다면, 이번엔 통일된 역사를 가르칠지 다양한 역사를 가르칠지를 두고 공허한 2회전이 이어지게 된 셈이다.
물론 정 총리의 답변은 교육부에서 비롯됐다. 앞서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국감에서 "교과서 검정에서 상당히 많은 문제가 드러나 국정체제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다"며 국정 전환으로 이번 문제를 봉합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하지만 교육부의 이런 접근은 실현 가능성도 낮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과서 검정의 진정한 문제점을 호도하는 악수(惡手)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사실 이번 역사교과서 논란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 역사에 대한 학계의 시각이 학생들에게 혼선을 일으킬 정도로 크게 갈라져 있는 현실이다. 둘째는 사관과 별도로, 교과서 전반의 오류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고교 역사교과서만 해도 교학사 오류가 251건, 나머지 7종 교과서 집필진이 스스로 인정한 오류가 622건 등 모두 873건에 달했다.
이 두 가지 문제점 중 최근 논란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건 사관이다. 하지만 사관의 차이는 결국 인식과 해석, 가치관의 문제라는 점에서 일조일석에 풀기 어려운 문제다. 반면, 오류 문제는 논란에서는 어물쩍 비껴 갔지만 학생들에게 미치는 현실적 악영향은 훨씬 심각하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바로잡을 심의ㆍ검정 시스템 개혁을 슬그머니 젖혀둔 채 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추진으로 이번 문제를 봉합하려는 교육부의 해법은 논란에 편승해 더 큰 치부를 덮고 지나가려는 무사안일 행정의 극치라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교육부는 국정 교과서로 전환하면 오류 문제도 개선될 것처럼 말하지만 큰 착각이다. 현행 교과서의 오류는 국정이든 검정이든, 역사든 다른 과목이든 가릴 것 없이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그 동안 수없이 지적된 잘못된 사실과 해석, 엉뚱한 자료나 사진의 인용 같은 단편적 사안을 거듭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현행 교과서의 오류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
일례로 현행 중학교 2학년 도덕 검정 교과서엔 '청소년기의 비인간화 문제'라는 단원이 나온다. 그 단원의 소제목 중 하나의 제목도 '비인간화 문제의 극복'이다. 그러나 정작 '비인간화'가 어떤 개념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본문 어디에도 없다. 비인간화 사례로 과소비나 게임 몰두가 제시돼 학생들로서는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비인간화 문제에 대한 이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잘못된 기술체제다. 해당 교과서 편집장은 "애들이 다 알 걸로 생각했다"거나 "교육부 집필요강에 정의를 쓰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했다가, "학문적으로 정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는 주제"라는 등 허둥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다. 교육부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든 심의ㆍ검정 오류에 대해 거의 책임지지 않는 현행 시스템이 결국 겉치장만 화려한 저질 교과서를 양산했다. 교육부는 애먼 헛발질할 생각 말고, 심의ㆍ검정 시스템 전면 개혁안부터 내놓길 바란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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