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근대적 삶의 핵심코드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자유를 위한 기반 구축 가능해져노동의 대가로 돼지 한 마리를 받는 다면 문학가나 학자 의사 같은고도의 정신 작업을 요하는 직업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가장 예민한 모더니스트였던 이상의 소설에는 매춘부와 돈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예술가 혹은 지식인 남편은 아내가 매춘을 통해 벌어오는 돈으로 연명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무구한 태도로 돈에 대해 메스꺼움과 혐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흡사 신진대사의 일부처럼 아내는 종아리에서 돈을 뱉어내는 것으로 표현되고('지주회시'), 남편은 그런 돈을 한 푼 한 푼 모아 일부러 변소에 빠뜨린다.('날개') 이상 소설의 근본서사라 할 만큼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고 있는 패턴이다. 도대체 왜일까?
게오르그 짐멜(1858~1918)의 에 따르면, 돈의 본질과 매춘의 본질 사이에는 숙명적 유사성이 발생한다. "돈의 사용의 모든 무차별성, 그 어떤 인간 주체와도 진정으로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주저 없이 모든 주체로부터 분리되는 돈의 불충함,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돈에 특유한 그리고 모든 감정적 관계를 배제하는 돈의 객관성" 때문이다. "매춘은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단순한 수단으로의 상호전락의 가장 명확한 보기이며, 그래서 화폐경제, 즉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수단의 경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이 유발한 쾌락 속에서도 언제나 냉담한 매춘부의 이미지는 그러므로 그대로 화폐의 알레고리다. 단지 감수성만으로 이 본질적 상동성을 포착해낸 한 예술가의 위대성은 돈을 철학의 주제로 과감하게 끌고 들어온 짐멜의 위업에 의해 보장받게 된다.
독일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짐멜의 대표적 저서 이 독일어 최초 완역으로 새롭게 출간됐다. 평생 31권의 저서와 256편의 방대한 글을 남긴 짐멜은 게오르그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 알베르트 슈바이처 등 당대의 문화적 엘리트들까지 앞다퉈 그의 강의를 들을 정도로 유명했던 "베를린의 특별한 지적 사건"이었다. 유추적인 접근법을 구사하며 에세이 형식의 글을 많이 썼던 그는 체계적이고 연역적인 사유와 논리를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학계에서 다소 이질적인 존재였던 탓에 5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학 정교수가 됐지만, 그가 남긴 방대하고도 탁월한 지적 성취는 훗날 수많은 인문학 분야에 풍부한 광맥이 되었다.
짐멜은 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특허품 같았던 화폐라는 주제를 "경제적 현상의 외면적 차원으로부터 심층적 차원으로 뚫고 들어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궁극적 가치와 의미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돈은 "개인적인 삶과 역사의 가장 심층적인 흐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기술하기 위한 수단, 재료일 뿐"이다. 왜 하필 돈인가? 그것은 인간 정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돈에서 강력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짐멜이 보기에 "돈은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적절한 표현"이다. 교환은 삶의 형식이며, 사물들의 가치는 교환을 통해 주관적인 차원을 벗어나 상호 주관적이 된다. 객관성에 육박해가며 사물의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과정, 즉 "인간이 상징물을 구성하는 능력"은 돈에서 최고도로 발전했으며, 주체와 객체(대상) 간의 가장 순수한 상호작용은 돈에서 그 가장 순수한 표현을 발견했다. 돈은 가장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다.
변증법적 사고의 자장 안에 있는 짐멜은 이 책에서 상호작용을 '규제적 세계원리'로 고수한다. 상호작용은 짐멜의 지적 세계 전반을 주도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다.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인간만 돈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돈도 인간에게 작용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돈의 본질을 일반적인 삶의 조건과 관계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1부 '분석'과 돈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하게 된 근대적 삶의 본질과 모습을 추적하는 2부 '종합'으로 구성돼 있다.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한 논의들은 "무차별화되고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한 상징이자 원인"인 돈의 본질을 논한 1부보다는 주로 돈이 인간 삶의 형식을 규정하게 되는 과정과 양태를 설명하는 2부에 집중돼 있다. 돈에 대한 짐멜의 방법론을 통해 해석될 수 있는 것은 비단 매춘만이 아니다. 근대적 삶의 거의 모든 것의 본질이 돈을 통해 해석될 수 있다. 살인배상금과 벌금, 매매혼, 신부 지참금, 뇌물 등 극단화된 인격적 가치의 등가물에서부터 노동분업과 화폐임금, 지성 활동, 신용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광범위하다. 일례로 수학적 연산을 필연적으로 만든 화폐경제로 인해 근대의 인간은 모든 가치를 아주 작은 단위로까지 세분화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이를 통해 삶의 내용에 훨씬 더 큰 정확성을 부여하고 경계를 더 엄밀하게 확정하는 태도를 익히게 됐다.
특기할 만한 것은 짐멜이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자본주의를 "이제 단순히 거역하거나 그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역사ㆍ사회적 세력과 질서"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문화의 파괴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다. 인격에 대비해 '물격'으로 표현되는 물질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짐멜은 개인 의지와 능력 여하에 따라 인간이 화폐를 통해 자유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화폐 덕분에 가축이나 곡물로 노동의 대가를 받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서 다양하고도 추상적이며 지적인 직업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지금도 노동의 대가로 돼지 한 마리를 받고 있다면, 이 세계에 문학가나 학자, 의사 같은 고도의 정신작업을 하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게 짐멜의 추측이다.
짐멜은 돈이 신도 악마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이 세계의 본질적인 운동형식의 상징"이다. 그는 20세기를 여는 시대의 명저를 통해 돈이 단지 생산수단이나 경제학적 논구의 대상만이 아니라 근대적 삶과 근대성에 대한 사유의 핵심적 코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도 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 돈은 이제 지양하기보다는 변증법적으로 고양해야 할 우리 현대적 삶의 중심축이다. 그러므로 짐멜은 돈이 인간 자유의 해방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최초의 철학자로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환영받아야 마땅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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