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절박하게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제 어미 앞에서만 드러내는 패악, 약자 앞에서 유독 커지는 잔인성, 끝까지 타인의 인격을 용서해주지 않았던 내 인격의 누추함.
'화라지송침'의 주인공 '나'는 학원 강사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백수 남편이다. 아내를 위해 꿀에 홍삼을 재우고, 유치원에서 오는 아이를 마중 나가고, 빨래를 널다가 백석의 시를 읽기도 한다. 헌신적인 아내와 야망 없는 남편이 그럭저럭 지탱해온 일상이 깨진 건 기종씨 때문이다. 아내의 재종동생, 그러니까 아내의 할아버지의 형님의 아들의 아들, 즉 육촌 동생인 기종씨는 소식이 끊어진 지 15년 만에 한 양돈 축사에서 '노예 청년'으로 발견된다.
"전 괜찮은데요"
인근 주민의 신고로 구조돼 임시보호소에서 마주한 기종씨는 정신이 퇴화된 상태다. 말끝마다 빠르게 "전 괜찮은데요"를 붙이는 그는 차려주는 밥을 광속으로 먹어 치우고 얌전히 방에만 앉아 있는다. 확고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를 앞에 두고 있을 때뿐. 크리넥스나 냅킨은 괜찮지만 유독 화장실 벽에 매달린 두루마리 휴지만 보면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떤다. 그때부터 '나'의 기종씨 갱생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건물 청소부로 일하게 된 그를 위해 '나'는 휴지 주고받기 놀이를 하며 공포증을 치유하려 애쓴다.
'나'가 베풀던 소소한 선의는 어느 날 퇴근한 기종씨와 함께 집으로 가던 중 끝장난다. 어쩌다 앞서게 된 기종씨가 '나'도 모르던 지름길을 이용해 아파트에 도착한 것.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어떻게 이 길을 알고 있는 걸까. 언제 얼마나 자주 이 집에 왔던 걸까.
아내는 결혼 전 자신의 가정사를 들려준 적이 있다. 엄마가 도망 가고 아버지가 폐인이 됐을 때 큰할아버지가 자기네 가족을 거둔 이야기,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산 큰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삼촌(기종씨의 아버지)이 자신의 가족에게 퍼부은 모욕에 대해. 한참 후 아내와 장인어른은 그 집에서 독립했고 2년 후 큰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 집은 몰락한다. 큰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삼촌의 사업이 망하고 목을 매 죽기까지 걸린 시간은 4~5년 남짓. 그 동안 삼촌과 아들인기종 씨는 무엇을 했을까. 혹시 아내의 집에 찾아온 건 아닐까. 몸이 절로 기억할 정도로 자주 찾아와 사촌동생인 장인어른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밤 술 취해 들어온 아내는 잠든 기종씨의 머리맡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가…가라고…가라고, 이 종놈의 새끼야…"
에는 무관용과 죄책감, 은폐가 끈끈하게 엉겨 있다. 관용을 이기호 작가는 '참아낸다'는 말로 표현한다. 모욕의 기억 때문에 사촌 형을 참아내지 못한 장인어른, 그 아들인 기종씨를 참아내지 못한 아내, 그리고 일상을 깨면서까지 기종씨를 참아줄 생각이 없었던 '나'. 누추한 인격들은 기종씨의 정신지체 덕에 조용히 은폐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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