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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작 지상중계] 이현수 <나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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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작 지상중계] 이현수 <나흘>

입력
2013.11.0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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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을 사람들은 단체로 노근리사건을 함구하고 있었을까? 할아버지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분명 할아버지는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노근리사건을 굳이 숨겨야만 했을까. 무엇 때문에……?"(83쪽)

의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감독 김진경처럼 작가 이현수도 1999년 AP통신의 특종 보도가 있기 전까진 고향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지 못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한국전쟁 중 노근리 학살 사건이 일어난 쌍굴이 있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정작 마을 어른들 누구에게도 진실을 듣지 못했다. 그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고 했다.

진경은 고향이 영동이라는 이유로 노근리사건을 취재하라는 국장의 지시를 받고 마뜩잖은 하향에 나선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황간면의 역사에 대해 들은 건 동학 대접주 조재벽의 고향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한국전쟁이 남긴 흉터는 감쪽같이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손녀의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깊은 상처는 덮어둔 채 덤덤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게 그리 큰 일이란 생각도 못 했어. 그땐 죽음이 흔했다. 우린 죽음에 무감각했었다고."

고조부는 고종을 모시던 내시였다. 증조부는 다섯 살 때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고환을 물려 고자가 된 뒤 고조부에게 입양됐다. 진경의 조부는 내시도 고자도 아니었지만, '내시 가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소설의 한 축을 이루는 건 할아버지 김태혁이 풀어놓는 5대에 걸친 가족사와 그만의 개인사다. 집안 머슴의 아들이었던 친구 박기훈, 조부가 오래도록 사랑했으나 끝내 인연을 맺지 못 했던 기훈의 아내 서인영의 내밀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노근리사건은 거대한 삶의 맥락 속으로 편입한다.

진경과 태혁이 번갈아 가며 '나'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단 한 번 외부인의 시선이 끼어든다. 전쟁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구원자이면서 희생자였던 미군 버디 웬젤. 서사의 한복판에 자리한 그의 증언은 노근리사건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게 돕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총성이 현재의 삶 속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걸 웬젤이 말해준다.

"난 대학에서 곤충을 연구한 탓에 노근리의 매미들을 눈여겨봤다. […] 노근리의 매미는 지금도 내 속에 머물러 있고 세월이 흘러도 좀체 소리가 작아지는 법이 없다."

진경이 취재를 할수록 노근리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만 정작 자신과 관련한 미스터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머니 채희는 왜 죽었는가. 외조부모의 죽음과 채희는 무슨 관계인가. 역사가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킨 복잡한 거미줄의 형체를 드러내면서 개인의 좌표를 물을 때, 자아는 일순간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제 위치를 찾아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고향에 내려온 뒤 산전, 수전, 공중전을 겪었다. 낭떠러지의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저 월류봉의 소나무처럼 온몸이 휘어지도록 찬바람을 맞는다 해도 이젠 얼마든지 견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뽑은 패가 그리 나쁜 패만은 아니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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