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한 산업단지에서 소켓 커넥터 등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벤처기업을 운영 중인 박모 사장은 창업 후 몇 년 간 고생을 하다 드디어 기회를 만났다. 완성품 시장의 수요가 늘면서 부품 주문이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를 놓칠세라 박 사장은 운영자금을 확보하려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은행들은 신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부했다. 제 2금융권이나 사채시장까지 알아봤지만 이자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담보로 맡길 만한 부동산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기술력만으로도 대출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회사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 확인서를 비롯한 관련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보증기관의 기술평가를 통과한 그는 올 9월 한 시중은행으로부터 총 10억 원의 운전자금을 지원받았다. 금리는 연 3.2%로 신용으로 빌렸을 때보다 절반 가량 낮았다.
충남 보령시에서 한우농장을 운영하는 이 모씨 역시 사료값 등 운영자금이 필요했다. 신용대출은 한도가 꽉 찼고 부동산은 '담보 부족'이란 판정을 받았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은 한우 150두. 한 시중은행은 전체 한우 평가액의 40%를 인정해 1억 원의 운영자금을 빌려줬다. 대출금리는 연 3.86%였다.
담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토지 아파트 등 부동산이나 주식 적금 등 금융자산을 넘어 기술력이나 한우 등 유무형의 자산들이 담보 대상이 되고 있다. 음원이나 브랜드명 등 저작권이 있거나 자산으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담보물이 되는 시대도 머지 않았다.
이 같이 담보대출의 경계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 8월부터다. 부동산이 아닌 쌀이나 가축 기계설비 같은 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출시 이후 1년 간 17개 은행들이 2,400여개 업체에 6,200억원의 대출을 취급했다. 올 5월부터 돼지도 담보 대상으로 추가됐고 금융당국은 제2금융권으로 대출 취급 기관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올 들어서는 지식재산권(IP) 담보 대출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특허권이나 상표권 디자인권 등 법규에 의해 권리가 인정되는 무형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것이다. 이는 벤처 육성을 통해 창조 경제를 구현하려는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도 맞물려 있다. 기술력이 우수한 벤처 기업들을 적극 지원하는 취지다.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산업은행은 1,000억원 규모의 IP투자펀드를 조성한 데 이어 지난달 7일 국내 최초로 IP를 담보로 한 대출을 시행했다. 산은은 대출심사를 받은 100여 개 업체 가운데 성장성 등이 검증된 5개 업체를 선정해 총 67억 원의 대출을 집행했다. 산은은 특히 대출기업이 부실화될 경우에도 여신 회수가 가능하도록 회수지원기구에서 담보IP를 매입할 수 있는 방식을 도입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채권회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은행들이 IP담보 대출에 주저했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산은 관계자는 "현재 추가로 10여개 업체의 지식재산권을 심사 중이며 내년 이후에는 대출규모를 더욱 늘릴 것"이라며 "앞으로는 음원이나 브랜드 등 다양한 지적재산권이 담보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은행은 올 6월부터 기술보증기금과 함께 200억원 규모 'IP보유기업 보증부대출'을 판매하고 있으며 다른 시중은행들도 IP대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동산이나 IP담보 대출이 자리잡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은행들이 창조경제에 호응하기 위해 올 초부터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실제 실적은 부진한 상황이다. 김기준 민주당 의원은 "불경기에 중소기업들의 숨통을 터주려면 부동산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에 대한 금융당국의 강력한 지도·감독이 필요하다"며 "은행들이 기업의 창의성, 기술력, 발전 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는 심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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