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전주지법이 열흘 간의 장고 끝에 안도현 시인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죄는 된다고 생각하나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을 감안해 선고를 유예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나름대로 고심해 유무죄는 판사가 판단하고 양형만 배심원 평결을 따르면 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번 판결은 사건 자체보다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판결'이라고 할 만큼 여러 화두를 던졌지만, 배심원과 피고인 그리고 검찰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판결이 됐다.
전주지법 형사2부(부장 은택)는 안 시인에게 법과 판례에 따라 죄가 인정된다고 밝히면서, 2년이 지나면 면소가 되는 선고유예 형을 내려 처벌은 하지 않았다. 전원 무죄 평결을 내린 배심원의 결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 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판부가 가장 고민한 부분은 헌법이 보장하는 법치주의와 '배심원 평결'로 대표되는 민주적 정당성을 어느 수준에서 접목해야 할지 여부였다. 재판부는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따른 배심원의 의견은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뜻과 의지를 표출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이상 존중해야 한다"며 "(그러나) 배심원의 의견이 법관의 직업적 양심과 근본적으로 충돌할 경우에는 양형에 한해서만 (평결의) 기속력을 가진다"고 결론 내렸다.
국민참여재판의 근간이 된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은 배심원단의 평결을 '참고'하라고만 규정하고 있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법 개정안도 평결을 '존중'하라고만 명시했을 뿐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재판부는 이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양형'만 배심원 평결을 따르면 된다고 나름의 기준을 만든 것이다. 재판부는 이 같은 기준에 대해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법의 지배의 이념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중화상생의 원리에 입각한 제3의 길이라고 본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처럼 (법원과 배심원단) 어느 한 쪽의 의사를 우월적 지위에 놓을지, 쌍방 조화적 지위에 놓을지에 관한 문제는 결국 국민참여재판의 운용 형태에 관한 것"이라면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수렴해 공감대를 형성한 후 입법적 결단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법조계에선 현행 법체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판결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다수의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한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2008년 참여재판 시행 이후 지난해까지 배심원 무죄 평결을 재판부가 유죄로 뒤집은 62건 대부분이 살인, 강도 등 법리적 지식이 크게 필요 없는 사건이었지만, 공직선거법 사건은 법조인 사이에서도 판단이 미세하게 달라 배심원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배심원 평결을 어느 선까지 존중할지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에선 비슷한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참여재판 변호 경험이 있는 한 중견 변호사는 "정치적 판결이라는 지적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발언"이라며 "핵심은 사법개혁의 산물인 국민참여재판을 이번 판결을 통해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판결은 잘 했다 못 했다 차원이 아닌 시대의 과도기적 산물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법무부가 배심원 평결의 기속력 등을 추가한 국민참여재판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태여서 국회 논의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이어질 예정이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