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을 해서일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자신의 일 안에서, 자신이 응대해야 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자세를 보일 수 있을까.
버스를 타고 지방 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버스 창밖으로 가고자 하는 절 안내판이 계속 보이길래 기사에게 어디서 내리면 그곳으로 가기 쉽겠냐고 물었다. 기사는 잘라 말했다. 종점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 타면 된다고. 중간에 내리면 많이 걸어야 하니 그게 낫겠다는 게 아니라 무심히 그렇게만 대답한다. 말해준 그 터미널에 내려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서 휴대전화 충전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충전이 안 된다고 한다. 주인의 전화기는 버젓이 충전중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버스 운전을 하며 식당을 차렸을까 의심스럽다. 이런 경우 내가 하는 욕은 이 정도다. '무엇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으니.' 사람다워지려고 배낭을 메고 나왔는데 사람 앞에서 쪼그라드는 기분만 드니 이러려면 집에나 있지 왜 밖에 나왔는가 싶다.
소도시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시간표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면 최종 목적지와 버스 요금만 나와 있지 경유하는 곳에 대한 정보는 일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역 주민들만 중간에 어디를 경유하는지를 알고 이용할 뿐 나 같은 여행자는 한참 헤매게 되거나 그러다 버스를 놓치게도 된다. 물어서 친절하게 안내를 받는 경우는 절반도 안 된다.
이번엔 여객선터미널. 시간을 내서 여행을 하러 온 중년의 여인 둘이 보였다. 배를 타고 섬엘 들어가고 싶은데 시간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은 잔뜩 걱정을 하다가 여객터미널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느 섬을 가면 좋은지, 가면 뭐 볼 게 있는지, 안 자고 당일 나올 수 있는지. 여인 둘의 질문이 조금 많고 길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대뜸 말했다. 그런 건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세상에나, 그건 인터넷이 할 일이 아니라 여객터미널에서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대신 따져주고 싶었다. 두 여인은 잠시 민망해하다가 '정말 안 좋게 말하네' 하고는 아쉽게 여객터미널을 떠났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생각의 기준도 불쾌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여인네 둘이 시간을 쪼개 호젓하게 여행을 하려던 시도를 무참히 짓밟은 그 젊은 사내가 가엾기 시작했다. 맡은 일이 많은 걸까. 그렇게 귀찮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그렇더라도 그곳은 여행자들을 맞고 보내는, 여행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세상의 성소(聖所) 아닌가.
놓치는 것이라면 괜찮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한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터진다. 그런 업종에 있으니 여행 감각이 풍부해야 한다고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감각과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좋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휴대전화로 기차표를 예매하고 시간에 맞춰 기차에 올라탔으나 어찌된 일인지 내가 앉을 자리에 한 승객이 앉아 있었다. 당연히 서로의 표를 확인하는 사이, 역무원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과정을 설명하는데 아뿔싸. 내 표가 그날이 아닌 다음날 표로 예매된 것이다. 입석표라도 끊어서 가겠냐고 역무원이 물었다. 3시간을 넘게 서서 가기엔 자신이 없었다. 직원은 다음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다음 역까지 해당하는 차비를 내겠노라 했다. 역무원이 말했다. 그것이 원칙이지만 그냥 내려도 된다고.
나는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표는 잊지 말고 꼭 취소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철도회사 입장으로 보면 좋지 않은 직원이지만, 탄력적이며 유연한 처리능력으로 보아 그 사람은 그 일터에서 어떤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봐주어서가 확실히 맞다.
낯선 길에서 역시 사람으로 대우 받는 것, 사실 그것이 여행이니까.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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