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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8일] 무엇이 시에 짜증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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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1월 8일] 무엇이 시에 짜증나게 하는가?

입력
2013.11.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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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소설을 쓰면서 있지도 않은 저자나 책을 실재하는 양 언급하고 인용한다. 진짜와 가짜를 그럴듯하게 섞어놓았기에, 그가 인용하는 게 실제 있는 인물이나 책이라고 믿었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이럼으로써 인용에 의해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실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멋지게 보여준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최대한 정확히 인용하려 애를 쓴다. 내 주장이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고 싶어서고, 그에 관심 있는 이들이 그의 책을 직접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싶어서다.

그런데 며칠전 아주 당혹스런 일을 겪었다. 최근 책을 하나 출판하려 준비 중인데,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가 상당히 많이 인용되어 있다. 어제 출판사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인용한 시가 8편인가 되는데, 편당 저작료를 6만원가량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된 글이 시만이 아닌데 왜 시만 그래야 하는지 물었더니, 시집 저작권을 많이 가진 출판사 몇 개가 시에 대해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제 이런 식이면 시를 인용해서 글을 쓰는 것은 날샜다. 요즘 시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열심히 읽는 중인지라, 누가 옆에서 시 가지고 철학적인 책을 하나 쓰라고 권하기도 하던데, 시작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인세 보다 많은 저작료를 지불해야 했을 게 뻔하니.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시를 갖고 이런 식으로 저작료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시 아닌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바보가 아닌 한 가만 있을 리 없다. 소설은 물론 역사책을 인용하는데도 돈을 내고, 철학적 개념 옆엔 가령 'ⓒ들뢰즈' 식으로 표시를 해야 하는 끔찍한 사태를 그저 과장된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에 지적 재산권에 대한 책을 읽다가, 가령 유방암 유전자에 대해 연구하려면 이미 특허권이 나 있는 수많은 유전자 지도를 이용하는 저작료가 너무 많아서 번거로움과 비용 때문에 연구를 접고 돈 안드는 다른 거 한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젠 이제 유전자 연구가 아니라 시가 그렇게 되게 생겼다. 아니 인문학이.

결국 원고에서 인용된 시를 모두 삭제하기로 했다. 다시는 시를 인용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다. 한 두줄 인용할 때마다 6만원씩 돈 달라는데, 돈도 돈이지만, 그 찌질하고 집요한 소유권 개념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시란 원래 어떤 것보다도 장사나 계산과 거리가 먼 게 아니었나? 그런데 이젠 시가 미시적 인용마저 색출하는 저작권의 첨병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그러나 지적 재산권에 관한 한 어디에도 없을만큼 강력하고 집요한 최첨단 미국에서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아, 이제는 건설업만이 아니라 출판업도 한국이 세계의 첨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인들이 벌 수 있는 저작료가 얼마나 될까? 시 비평하는 평론이야 어차피 돈을 받지 않을 텐데, 그밖의 글에서 인용의 대가로 받을 수 있는 돈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불려 계산해봐도 자잘한 잔돈을 넘지 않는다. 문학계를 주름잡는 출판사에서 시인을 보호하겠다면서 생각하는 게 고작 저 자잘한 저작료 챙겨주는 것밖에 없었던 걸까? 그것밖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시를 인용할 때마다 돈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잔계산이 좋아하던 시인들과 더 멀어지게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을까?

또 하나, 이런 조치가 정말 시인들의 저작권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인용될 때마다 시인들에게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을까? 나처럼, 인용한 시를 삭제하거나 아예 인용할 생각을 접게 되지 않을까? 시 두 줄에 저작료 내면서 시를 인용해줄 사람 찾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결국 시가 좀더 많은 독자들과 만날 기회를 빼앗고 말 것이며, 그래서 좋은 시가 있어도 알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그나마 안읽히는 시에게 그 운명 같은 저주의 무게를 더해주는 게 되지 않을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계산이 시와 시인들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두렵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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