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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작 지상중계] '쿤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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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작 지상중계] '쿤의 여행'

입력
2013.11.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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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편의점과 슈퍼마켓, 패스트푸드점과 동물병원과 안경점을 차례로 찾아가 아르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왔다고 말을 꺼냈다. 사람들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 신분증과 이력서를 함께 내밀고 최근에 쿤 제거 수술을 받았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따끔하게 충고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건 건강이 안 좋았건, 그런 건 우리가 알 필요가 없죠. 그냥 거울 한번 봐봐요. 미성년자잖아?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는 게 나을 거예요."

배에 붙어 자라는 쿤이라는 가상의 물질을 수술을 통해 몸에서 도려내면서 새삼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된 마흔 살의 여성 '나'의 고백이 올 가을호에 실린 윤이형의 단편 의 내용이다.

작가는 쿤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의 강점으로 꼽히는 SF적 장르문학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비극적 존재의 운명을 직접 묘사로 얄팍하게 위로하는 대신 환상의 형식으로 포착한다. 쿤은 "처음에는 우무나 곤약과 비슷하게 물컹거리는 회백색 덩어리였지만 내가 자랄 모습으로 자라났고 나는 그녀와 한 몸이 되어 살아 왔다"고 묘사돼 있다.

30대 후반인 작가는 "'성숙하지 못한 채 이대로 40대가 돼도 괜찮은 걸까'라는 위기감이 들면서 겉모습만 나이 먹은 나를 떼어 버리고 다른 삶을 사는 상황을 상상하게 됐다"고 작품 취지를 설명한다. "열심히 살았지만 스스로가 가짜 같다"는 작가의 말대로 소설 속 1인칭 화자는 쿤을 떼내 중학생처럼 몸이 작아진 후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스물네 살 때 소개팅을 하고 두 달 간 사귄 C 정도가 쿤 없이도 주인공을 제대로 봐 줄 뿐이다.

24페이지 분량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가상과 실제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작가의 독특한 작법에 현실 비판도 신선하게 녹아 들어 있다. "쿤이 달라붙은 채 괴상한 주머니처럼 생긴 옷을 입고 뒤뚱거리는 아이를 보통의 중학교 2학년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이들은 내 머리카락과 사물함과 책상과 미술 숙제에 껌과 죽은 쥐와 새빨간 물감으로 표시를 했다"며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비애를 전한다. 또 다녔던 대학교를 찾은 장면에서는 "이 공간이 어른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뉴스에도 소문 속에도 반대편 증거들만 넘쳐났다"고 말한다.

소설은 자신의 쿤과 함께 숨을 거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 본 주인공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다시 봄이 되었을 때, 나는 남편과 아이의 손을 잡고 그곳을 찾았다. 새로 싹이 올라오는 무덤 언저리를 밟았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 쿤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의 빈 곳을 그대로 비워둔 채 살았다면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평생 한 번이라도 이 세계를 보려고 집을 나설 수 있었을까. 나는 무덤 앞에 잠깐 서 있다가 흙 속에서 벌레와 진물과 어둠을 생생하게 견디고 있을 내 어린 아버지에게 말해주었다.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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