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희곡에 연극 생각하는 게 일이다. 주변에서 지치지 않느냐고 하는데 아직은 괜찮다. 그런데 고민이 있다. 오늘은 그 얘기를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겠다. 언젠가부터 쉽게 희곡이 안 써진다. 열정이 식지도 시간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마음대로가 안 된다. 무슨 대단한 걸작을 써보겠다는 욕심도 굳이 없다. 그저 연극하면서 재미있게 살고만 싶을 뿐이다.
언젠가 책에서 봤다. 노래기라는 발이 엄청나게 많은 절지동물에게 누가 물었다. 너는 그렇게 많은 발로 걷는데 어떻게 꼬이지 않아? 이 말에 노래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러게? 내 발이 안 꼬이네? 그 때부터다. 노래기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이 꼬여 넘어지기 시작했다. 분별내지 자각이 생기고 난 후부터다. 좋은 연극과 나쁜 연극이 보이고 의미가 있는 연극과 무의미한 연극이 보이고 나서부터다. 노래기는 발을 볼게 아니라 갈 길을 봐야 했고 나는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옳았다.
있는 그대로를 통째로 인정하는데 버릇이 들고 길이 났더라면? 나는 훨씬 더 호방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자잘한 재주를 피울 생각은 버리고 곧장 선배님들 가시는 길 따라서 가면 됐다. 그런데 괜한 연구를 했다.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을 따져서 부스럼이 났다. 가령 바람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공기의 이동? 바람은 그저 가끔 쐬고 싶은 어떤 것이다. 바다는? 지구에서 육지를 제외하고 짠물이 고여 있는 부분? 바다는 가끔 가고 싶은 곳이다. 그뿐이다. 그런데 왜 나는 바람과 바다를 더 깊이 알려고 애를 썼을까? 노래기는 늘 걷고 기는 일에 무심했지만 깨닫고 나서부터 작위적이 되고 말았다. 나도 여지없이 작위적인 글쓰기의 그물에 걸렸다.
희곡은 재미있는 장르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쓰면 되는 어떤 것이다. 일단 막 나가야 한다. 넘쳐서 흘러가게 제멋대로 나둬야 한다. 그런데 희곡의 품질이 먼저 보이기 시작하면서 박력을 잃었다. 먼저 재단을 하는 분별력의 시녀가 돼버렸다. 물길을 잡고 구비마다 무엇인가를 획책하려 했다. 즐거운 마음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고매한 착각에서 그 잘난 분석과 의미에 맛을 들이니 정작 미각이 망가졌다. 초밥장인이 어느 순간 밥알의 개수를 의식하면서 초밥의 맛이 달라진 셈이랄까. 왜 나는 타성적인 글쓰기의 진중한 매력을 버리고 조화를 부리려 했을까. 관성적인 글쓰기는 과연 나쁜가.
박경리 선생이 90년대 신문에 기고한 글이 생각난다. 타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제목이다. 나는 그때 하도 감동을 받아서 책상 앞에 그 글을 오려서 붙여놨었다. 맞아. 타성을 경계해야 해. 매일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일신우일신. 그런데 지금은 의문이 난다. 타성을 경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닐 때가 분명히 있다. 타성에 빠져서 사는 게 옳을 때가 분명히 있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매번 오는 손님들에게 다른 호흡으로 인사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부담스럽다. 판에 박힌 멘트가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 작가에게서는 그 작가만의 향기가 묻어나는 판에 박힌 글쓰기가 맞다.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하기 곤란한 지점이 반드시 있다. 색다른 걸 써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글이란 요원하지 않겠나.
무엇이든지 쪼개고 나누고 파고드는 게 대세. 세분화, 전문화, 차별화, 효율화를 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으름장. 어찌 이런 풍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세분화 되지 않았을 때 덜 예민해질 수 있고, 전문화 되지 않았을 때 응용력이 길러지며, 차별화 되지 않았을 때, 무난함의 미덕도 있다는 말, 하고 싶다. 효율성은 떨어져도 내구성이 있으면 됐다. 분별을 버리고 미련할 만큼 우직하게 가던 길로 쭉도 가봐야 한다. 매너리즘도 좋게 말하면 스타일리즘 아닌가.
PS.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더 단순하고 쉽게, 가급적 분별하지 않고 글을 쓰자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만만한 일 아니다. 막 쓸 수 있다면 성인의 반열이려니.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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