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목욕탕은 가장 사적인 행위를 하는 곳이면서 매우 공적인 장소이다. 가끔 아는 사람을 만나지만 동성이라는 '보편의 수건'을 허리에 두른 덕분에 훌훌 속옷까지 벗어버릴 수 있어 이불속보다 내밀하면서 시장 골목처럼 떠들썩하다. 여기까지가 목욕탕을 떠올렸을 때 1차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의미와 심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다 벗고 들어와 때를 민다. 어떤 이는 털도 민다. 탕 안에서 거죽을 씻어낸 이들에게 사회가 씌워준 탈은 허무하다. 습기를 걷어낸 거울 앞에 서면 나와 더 가까워진 나를 대면한다.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성찰하며 세속의 나를 죽이는 곳. 목욕탕은 각자의 도플갱어를 발견하고 과거의 나를 토막 쳐 수쳇구멍으로 내버리는 장소일 것이다. 목욕탕의 2차적 의미는 이렇다.
무대디자이너 여신동이 연출 데뷔작으로 서울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린 연극 '사보이 사우나'(1~10일)는 작가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운 그림 연작을 제한 시간(1시간) 동안 관람해야 하는 것처럼 난해하다. 목욕탕의 2차적 의미를 디자인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메스로 손질한 덕분에 무대 위엔 다양한 이미지들이 해체된 살점처럼 기괴하게 깔려있다.
여씨는 뮤지컬 '빨래', '모비딕', 연극 '말의 무덤' 등에서 보여준 독창적인 무대미술의 힘을 이번 '사보이 사우나'에선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무대엔 오직 미장센만 보일 뿐, 배우도, 대사도 흐릿하다. 인도인 배우의 못 알아들을 모국어 독백은 객석의 시선을 무대미술로 몰아붙이는 데 충실하다. 사보이 사우나에서 때를 밀고 제모를 해주는 인도인(아누빰 트리파티), 그리고 호기심에 이곳을 방문한 남자(김정훈). 이들은 이국적인 사우나 공간에서 목욕의 절차를 성실히 수행한다.
여씨는 어린 시절 경험한 생경하면서도 낙원처럼 느꼈던 목욕탕의 장면들을 무대에서 재현함에 있어 텍스트를 생략하고 대신 장면을 부풀렸다.
"말과 글로 설명하는 대신 이미지와 뉘앙스로 충분히 문제의식을 전할 수 있다고 봐요. 작가가 아니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대공간의 분위기에 객석이 집중하길 바랐습니다. 이 연극에서 배우는 무대 디자인의 일부이니까요."
제작 스태프 한 명이 무대를 가리는 커튼들을 뜯어내며 극은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분홍빛이 감도는 무대엔 사보이 사우나의 남탕 종업원인 인도인이 어슬렁거린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음악을 맡았던 정재일이 라이브로 장면에 맞는 곡을 연주하며 관객의 감정을 이끈다. 남자 손님은 사우나에 들어와 코르셋을 연상케 하는 야릇한 속옷마저 벗은 후 제모를 한다.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속옷을 벗고 곧바로 털을 깎아요. 이 모든 과정이 온전히 나의 모습을 찾는 여정을 뜻해요. 제모 후 팩을 하고 치장을 하지만 손님은 마음에 들지 않죠. 자아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무언가 덧발라도 실패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어요."
목욕의 끝은 치장이 아니다. 사보이 사우나에선 끝내 살마저 발라낸다. 극의 막바지, 사우나 휴게실에는 인간의 잘린 사지가 주렁주렁 매달린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자아와 영혼은 바뀌지 않아요. 육체마저 잘라낸 후에야 순수한 영혼만으로 이뤄진 자신을 만날 수 있어요. 진정한 자아를 목격하기 위해 때는 물론 육체마저 벗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목욕탕만한 공간도 없습니다. 진짜 자기를 발견하는 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다름 아닙니다. 목욕탕이 '금기의 장소'이며 '에덴 동산'으로 해석되는 부분이죠."
목욕탕답게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6명이 뚜렷한 조명 아래 나체로 무대를 서성인다. 한 폭의 그림처럼 목욕탕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지만 대사를 걷어내면서까지 깊게 전달하려던 메시지가 자칫 '누드연극'으로 가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남는다. 19세 이상 관람가.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선임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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